교과서는 오랫동안 두 문장으로 정리했다. 사람은 2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생겨났고, 문명은 큰 강 네 곳에서 시작했다. 2017년 이후 쌓인 연대 자료는 두 문장 모두와 맞지 않는다.
고고학 연대를 볼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그 숫자가 측정값이라는 사실이다. 유물에 날짜가 적혀 있지는 않다. 물질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속도를 재서 거꾸로 계산한 값이다. 계산에 쓰는 전제가 바뀌면 숫자도 바뀐다. 여기 실린 연대의 상당수가 2015년 이후에 수정된 값인 이유다.
표기 방식도 둘로 나뉜다. 10만 년보다 오래된 시기는 ‘몇 년 전’으로 적고, 문명이 등장한 뒤는 ‘기원전 몇 년’으로 적는 것이 관례다. 방사성탄소 연대는 대기 중 탄소14 농도가 시대마다 달랐던 것을 보정해 쓰므로, 보정한 값에는 cal BC나 cal BP를 붙여 구분한다.
사람족 계통에서는 두 발 걷기가 먼저 자리잡았다. 440만 년 전 아르디피테쿠스와 32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골반과 발은 직립보행에 맞게 바뀌어 있었지만, 뇌 용량은 침팬지와 비슷한 400~500세제곱센티미터에 머물렀다. 뇌가 커지는 것은 그로부터 100만 년 이상 지나서다.
석기의 시작 시점은 확정되지 않았다. 소니아 아르망 연구진은 2015년 케냐 로메크위 3 유적에서 330만 년 전 석기를 보고했다(하르망 외, 2015, Nature 521권 310~315쪽). 호모속이 등장하기 50만 년 전이므로, 도구 제작이 호모속의 특징이라는 전제가 흔들리는 자료다. 그러나 유물이 원래 더 젊은 지층에 있다가 비탈을 따라 쓸려 내려왔을 가능성을 두고 반론이 이어졌다. 이견이 적은 가장 이른 석기는 에티오피아 레디-게라루의 보콜 도라 1 유적에서 나온 261만~258만 년 전 올도완 격지석기다(브라운 외, 2019, PNAS 116권 11712~11717쪽). 같은 지역에서 280만 년 전 호모속 턱뼈가 나왔으므로, 호모속의 등장과 체계적인 석기 제작 사이의 간격은 20만 년 안팎이다.
190만 년 전 등장한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를 벗어난 첫 사람족이고, 11만 년 전까지 살아남았다. 200만 년 가까이 존속한 셈으로, 사피엔스가 지금까지 존재한 기간의 여섯 배가 넘는다. 아래 그림에 이런 구간들을 한 화면에 모았다.
그림 1. 화석과 유물로 확인되는 구간만 표시했다. 가로축은 로그 눈금이므로 막대 길이를 그대로 기간으로 비교해서는 안 된다. ‘중기 홍적세 호모’는 하이델베르겐시스처럼 분류가 확정되지 않은 집단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20만 년 전 동아프리카 기원설을 흔든 것은 두 건의 화석 연구다.
2017년 장자크 위블랭 연구진은 모로코 제벨 이르후드에서 최소 다섯 사람의 화석을 보고했다(위블랭 외, 2017, Nature 546권 289~292쪽). 함께 나온 불에 탄 석기를 열형광법으로 잰 연대는 31만 5천 년 전이고 오차는 3만 4천 년이다. 얼굴과 아래턱, 이는 오늘날 사람의 변이 범위 안에 들어오지만 머리뼈 뒤쪽은 길쭉해서 원시적이다. 발견 장소가 아프리카 북서쪽 끝이라는 사실이 결론을 바꿨다. 연구진은 사피엔스의 출현을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걸친 과정으로 보았고, 이를 범아프리카 기원 모형이라 부른다.
2022년에는 에티오피아 오모 키비시의 오모 I 화석 연대가 다시 계산됐다(비달 외, 2022, Nature 601권 579~583쪽). 케임브리지 대학의 화산학자 셀린 비달 연구진은 화석 위에 쌓인 화산재의 화학 성분이 샬라 화산 분출물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분출의 아르곤-아르곤 연대를 적용했다. 결과는 기존 19만 7천 년 전에서 최소 23만 3천 년 전으로, 오차는 2만 2천 년이다. 화산재가 화석 위에 쌓였으므로 이 값은 하한이다.
화석만 이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엘리너 스케리를 비롯한 스물세 명의 연구자는 2018년 화석 형태, 석기 전통, 유전 자료, 고환경 복원을 함께 놓고 사피엔스가 아프리카 전역에 흩어진 여러 집단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했다(스케리 외, 2018, Trends in Ecology & Evolution 33권 8호 582~594쪽). 집단들은 사막과 우림이 넓어지고 좁아지는 데 따라 갈라지고 다시 이어졌으며, 그 사이에 드문드문 유전자가 오갔다는 설명이다. 이 그림에 ‘아프리카 다지역 기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2023년에는 유전체 쪽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계산이 나왔다. 애런 랙스데일 연구진은 현생 아프리카 집단의 유전체를 새로 해독해 여러 인구 모형과 대조했고, 오랫동안 약하게 나뉘어 있으면서 유전자를 주고받은 두 개 이상의 줄기를 상정한 모형이 관측 자료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고 보고했다(랙스데일 외, 2023, Nature). 두 줄기의 유전적 차이는 1~4퍼센트로 작았고, 오늘날 집단 사이의 가장 이른 분기는 12만~13만 5천 년 전 코이산 계통과 나머지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모형이 맞는다면, 아프리카 안의 ‘고형 인류 혼혈’로 설명되던 유전 변이 상당수는 원래부터 나뉘어 있던 줄기 구조의 흔적이 된다. 두 줄기가 유전적으로 비슷했으므로, 이 예측대로라면 그 시기 아프리카 화석들은 형태도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아야 한다.
제벨 이르후드를 사피엔스로 분류하는 데 유보적인 연구자도 있다. 얼굴 형태가 80만 년 전 스페인 화석인 호모 안테세소르에서 이어진 원시 형질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2025년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연구진은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토마스 채석장에서 약 77만 3천 년 전 화석을 보고하면서, 사피엔스·네안데르탈·데니소바 세 계통의 공통 조상에 가까운 집단이 그 시기 아프리카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계통이 갈라진 시점을 두고는 숫자가 맞지 않는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고유전체를 현생인류 유전체와 대조해 계산한 값은 오랫동안 70만~50만 년 전이었다. 돌연변이 축적 속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이 값은 위아래로 10만 년 넘게 움직인다.
2025년 9월 25일 Science에 실린 연구는 다른 값을 내놓았다(펑 외, 2025, Science 389권 1320쪽, doi:10.1126/science.ado9202). 대상은 중국 후베이성 한장 강가에서 1990년에 나온 윈시안 2호 두개골 한 점이다. 지질학적 연대는 94만~110만 년 전인데, 눌려 찌그러진 탓에 그 연대만 근거로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돼 있었다. 니시쥔과 크리스 스트링어를 포함한 연구진은 고해상도 CT와 구조광 스캔으로 골절과 변형을 되돌려 복원하고, 머리뼈 화석 100여 점과 형태를 대조했다. 결론은 이 두개골이 데니소바인을 포함하는 아시아 계통(호모 롱기 분지군)의 이른 구성원이며 사피엔스 계통의 자매 집단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계산된 사피엔스와 아시아 계통의 분기 시점은 약 132만 년 전이다. 화석 형태에서 나온 값과 유전체에서 나온 값의 차이는 아직 좁혀지지 않았다.
데니소바인의 정체는 같은 해에 크게 정리됐다. 1933년 중국 하얼빈에서 발견돼 우물 바닥에 80년 넘게 숨겨져 있던 두개골, 이른바 ‘용인(龍人)’이 데니소바인으로 확인됐다. 푸차오메이 연구진은 뼈에 남은 단백질(2025, Science)과 치석에 남은 미토콘드리아 DNA(2025, Cell) 두 경로로 같은 결론에 닿았다. 14만 6천 년보다 오래된 이 두개골은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데니소바인 머리뼈다. 2010년 시베리아 데니소바 동굴의 손가락뼈 하나로 존재만 알려졌던 집단의 머리뼈 형태가 15년 만에 확인됐다.
같은 시기 아프리카 남부에는 또 다른 계통이 있었다. 2013년 라이징 스타 동굴계에서 나온 호모 날레디는 뇌 용량이 450~600세제곱센티미터로 사피엔스의 3분의 1 수준인데, 연대는 33만 5천~24만 1천 년 전이다. 사피엔스가 이미 아프리카에 있던 시기다. 리 버거 연구진은 2023년 이 종이 시신을 의도적으로 묻고 동굴 벽에 기호를 새겼다고 발표했다. eLife의 공개 심사에서 다수의 심사자가 증거가 주장을 받치지 못한다고 판정했고, 다른 연구진은 토양 혼합의 증거를 재현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매장 주장은 확정되지 않았다. 확정된 것은 뇌가 작은 사람족이 사피엔스와 같은 시대에 같은 대륙에서 살았다는 사실이다.
동남아시아 섬에도 별개의 계통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의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와 필리핀 루손섬의 호모 루손엔시스는 키가 1미터 남짓이고, 10만~5만 년 전까지 생존했다. 사피엔스가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던 무렵 이 섬들에는 다른 사람족이 살고 있었다.
‘현대적 행동’이 4만 년 전 유럽에서 갑자기 나타났다는 그림도 아프리카 자료 앞에서 유지되지 않는다.
남아프리카 블롬보스 동굴에서는 7만 3천 년 전 층에서 규질암 조각에 오커 크레용으로 그린 격자무늬가 나왔다(헨실우드 외, 2018, Nature). 여섯 개의 거의 평행한 직선을 세 개의 약간 굽은 선이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형태이고, 선들이 조각 가장자리에서 끊기는 것으로 보아 원래 무늬는 더 큰 면에 걸쳐 있었다. 이보다 이른 7만 5천 년 전 층에서는 기하 무늬를 새긴 오커 덩어리와 구멍을 뚫어 꿴 조개 구슬 마흔아홉 점이 나왔고, 10만 년 전 층에서는 전복 껍데기 두 개에 오커와 지방을 섞어 담아 둔 안료 제작 도구 일습이 나왔다. 같은 지역 디프클루프 바위그늘의 타조알 껍데기 새김무늬는 5만 5천 년 전보다 이르다. 블롬보스와 디프클루프의 무늬는 약 4만 년에 걸쳐 이어지며 단순한 형태에서 격자로 복잡해진다.
이 유물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다툼이 있다. 장식으로 보는 견해, 집단의 표식으로 보는 견해, 무언가를 지시하는 기호 체계로 보는 견해가 함께 있다. 어느 쪽이든 규칙을 가진 무늬를 되풀이해 만드는 행위가 사피엔스에게 10만 년 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밖으로 나간 시도는 여러 번 있었고, 그중 대부분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림 2. 막대는 그 지역에서 사피엔스가 확인되는 가장 이른 증거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뒤이어 사람이 끊이지 않고 살았다는 뜻은 아니다. 서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연대는 아래에 적은 대로 반론이 있다.
이스라엘 미슬리야 동굴에서 나온 사피엔스 위턱뼈는 17만 7천~19만 4천 년 전으로 보고됐다(헤르시코비츠 외, 2018, Science 359권 456~459쪽). 그때까지 아프리카 밖에서 가장 이른 사피엔스 화석은 스쿨과 카프제의 9만~12만 년 전이었으므로, 5만 년 이상 앞당기는 값이었다. 이 연대는 바로 반박을 받았다. 워런 샤프와 제임스 페이시스는 우라늄 계열 연대의 해석에 문제가 있으며 실제로 확실한 하한은 6만~7만 년 전이라고 주장했다(Science 362권 eaat6598). 헤르시코비츠 연구진은 화석 가까운 구획에서 나온 불에 탄 석기의 열형광 연대가 평균 17만 9천 년 전이고 표본 열다섯 점을 합치면 18만 5천 년 전이라고 답했다(Science 362권 eaat8964). 그리스 아피디마 동굴에서 21만 년 전 사피엔스 머리뼈가 보고된 사례도 있으나(하르바티 외, 2019), 같은 이유로 확정되지 않았다.
이 이른 진출들이 오늘날 인구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유전체 쪽에서 분명해졌다. 2024년 12월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연구진은 독일 라니스의 일젠회레와 체코 즐라티 쿤에서 나온 4만 2천~4만 9천 년 전 개인 일곱 명의 유전체를 해독했다(쥐메르 외, 2025, Nature 638권 711~717쪽). 라니스의 한 개체는 홍적세 사피엔스 뼈 가운데 DNA 보존 상태가 가장 좋았다. 두 유적의 개인들은 5촌에서 6촌 사이의 친족 관계로 이어지는 한 작은 집단이었고, 아프리카를 벗어난 계통 가운데 가장 일찍 갈라진 갈래였다. 여기서 확인된 네안데르탈인 유래 구간은 모든 비아프리카계 사람이 공유하는 단 한 번의 혼혈에서 나온 것이며, 그 시점은 4만 5천~4만 9천 년 전으로 계산됐다. 오늘날 비아프리카계 사람의 유전체에서 네안데르탈인 몫이 2~3퍼센트인 것도 이 한 번의 사건에서 비롯한다. 그보다 앞서 아프리카를 나간 집단은 유전적 자취를 거의 남기지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연대는 논쟁 중이다. 크리스 클라크슨 연구진은 북부 마제드베베 바위그늘에서 6만 5천 년 전 층을 보고했다(클라크슨 외, 2017, Nature 547권 306~310쪽). 갈판, 갈아 만든 붉은 안료, 날을 간 도끼가 함께 나왔고, 단일 알갱이 광자극발광 연대를 베이즈 모형으로 묶어 얻은 값이다. 제임스 오코넬과 짐 앨런은 모래의 연대와 유물의 연대를 같다고 볼 수 있는지를 오래 문제 삼아 왔고, 2025년에는 앞의 유전체 연구가 제시한 혼혈 시점을 근거로 6만 5천 년 도착설을 다시 반박했다(앨런·오코넬, 2025, Archaeology in Oceania). 네안데르탈인과의 혼혈이 4만 5천~4만 9천 년 전 한 번뿐이었다면, 그 혼혈 유전자를 가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조상이 6만 5천 년 전에 이미 도착해 있을 수는 없다는 논증이다. 두 자료가 같은 시간대에서 충돌하며, 어느 쪽 해석을 고치느냐는 정해지지 않았다.
유럽 진입 시점은 반론이 적다. 불가리아 바초 키로 동굴에서 나온 사피엔스 뼈와 이는 4만 5천 년 전보다 이르고, 함께 나온 석기는 몽골까지 이어지는 기술 계통에 속한다(위블랭 외, 2020, Nature 581권 299~302쪽). 이 층의 방사성탄소 연대는 4만 5천 820년에서 4만 3천 650년 전 사이이며 확률은 95.4퍼센트다. 같은 동굴의 중기 구석기 층은 5만 1천 년 전보다 이르고, 두 층 사이에는 3천 년 넘는 공백이 있다. 사피엔스가 들어올 때 네안데르탈인은 아직 유럽에 살아 있었고, 4만 년 전 무렵 사라졌다.
아메리카는 오랫동안 1만 3천 년 전 클로비스 문화가 최초라는 통설이 지켰다. 2021년 뉴멕시코 화이트샌즈에서 2만 3천~2만 1천 년 전 사람 발자국이 보고되자 측정 신뢰성을 둘러싼 반박이 이어졌고, 연구진은 세 차례에 걸쳐 다른 시료로 답했다. 2023년에는 모래알의 광자극발광 연대와 다른 식물의 방사성탄소 연대를 제시했고(피가티 외, 2023, Science 382권 73~75쪽), 2025년에는 발자국이 찍힌 진흙 자체를 방사성탄소로 재어 2만 700~2만 2천 400년 전이라는 값을 얻었다(홀리데이 외, 2025, Science Advances 11권 25호).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시료와 세 곳의 실험실에서 나온 쉰다섯 개 연대가 같은 구간을 가리킨다. 같은 층에서 석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유보하는 연구자가 남아 있지만, 아메리카 진입을 최소 2만 년 전으로 보는 쪽이 우세해졌다.
다음 단계의 통설은 이렇게 이어졌다. 농사를 지으면서 사람들이 한곳에 머물렀고, 남는 식량이 생기자 신전과 도시가 섰다는 순서다. 튀르키예 남동부 괴베클리 테페는 이 순서를 뒤집었다.
샨르우르파 북동쪽 게르무쉬 산지 꼭대기에 있는 이 유적은 높이 15미터, 면적 9헥타르의 언덕 전체를 사람이 쌓아 올렸다. 높이 5.5미터, 무게 10톤에 이르는 T자형 석회암 기둥을 원형으로 세운 구조물이 지표 탐사로 최소 스무 기 확인됐고, 기둥에는 멧돼지·뱀·새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발굴된 부분은 전체의 5퍼센트에 못 미친다.
연대 측정은 까다로웠다. 구조물을 다 쓴 뒤 사람들이 흙으로 일부러 메워 버렸기 때문에, 메운 흙에서 나온 유기물의 연대가 구조물을 세운 시점을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다. 연구진은 여러 경로를 시도했다. 벽돌에 낀 토양 탄산염 껍질은 구조물이 묻힌 뒤에야 형성되기 시작하므로 층서 순서를 확인하는 데는 쓰였지만 축조 시점을 재지는 못했다. 올리버 디트리히와 클라우스 슈미트는 D 구역 벽에 남은 진흙 회반죽에서 시료를 얻어 이 문제를 피해 갔다. 킬 대학 가속기질량분석 연대는 9984±42 BP였고, 보정하면 기원전 9675~9314년이다(2σ 구간, 확률 93.9퍼센트). 유적의 가장 이른 층은 토기 없는 신석기 A기, 곧 기원전 9600~8800년에 해당하고, 그 위층은 토기 없는 신석기 B기 전기와 중기인 기원전 8800~8200년에 해당한다. 후기 신석기 이후의 유물은 이 유적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 구조물을 세운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밭이나 곡물 저장 시설의 흔적이 나오지 않는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염소와 양이 길들여진 것은 기원전 9000년경, 돼지는 8500년경, 소는 8000년경이다. 큰 돌을 캐내고 옮기고 세우는 공동 노동이 농경을 불러온 원인이었을 수 있다는 해석이 여기서 나온다. 인과의 방향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괴베클리 테페는 혼자가 아니다. 2019년부터 튀르키예 문화관광부가 진행한 타쉬 테페레르(‘돌 언덕들’) 조사로 샨르우르파 일대에서 열두 곳 안팎의 동시대 유적이 확인됐다. 그중 카라한 테페는 T자형 기둥 형식이 같으면서도 주거 흔적이 더 뚜렷해, 이런 구조물이 지역 전체에 퍼진 관행이었음을 보여준다.
농사가 서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세계로 퍼졌다는 문장도 자료와 맞지 않는다. 서로 닿지 않는 여러 지역에서 각자 다른 작물로 농경이 시작됐다.
작물도 시점도 방식도 서로 다르다. 공통점은 마지막 빙기가 끝나고 기후가 안정된 뒤에 일어났다는 것뿐이다.
농경이 여러 곳에서 시작됐다는 사실과, 그것이 어떻게 퍼졌는가는 다른 문제다. 유럽의 경우 고유전체 연구가 답을 좁혔다.
오랫동안 두 가설이 맞섰다. 기술과 관념만 전해졌다는 문화 전파설과, 농경민 자체가 이동했다는 인구 전파설이다. 2015년 이후의 전장 유전체 연구들은 인구 전파 쪽을 지지한다. 그리스와 아나톨리아의 신석기 개인들은 유럽 각지의 초기 농경민과 유전적으로 가깝게 묶이고, 같은 지역에 먼저 살던 수렵채집민과는 뚜렷이 구분된다(호프마노바 외, 2016, PNAS). 독일의 초기 신석기 농경민은 아나톨리아 계통 조상이 93퍼센트, 서유럽 수렵채집민 계통이 7퍼센트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나톨리아 안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아나톨리아 중부의 신석기 이전 개인과 초기 신석기 개인의 유전체를 비교한 연구는 같은 유전자 풀이 7천 년에 걸쳐 이어지는 것을 확인했다(펠트만 외, 2019, Nature Communications). 농경이 시작된 곳에서는 원래 살던 사람들이 농사를 시작했고, 그 뒤 밖으로 퍼질 때는 사람이 함께 움직였다는 뜻이다.
기원전 4000년에서 1000년 사이, 서로 닿지 않는 여러 지역에서 도시와 국가가 만들어졌다. 어느 곳에서도 갑작스럽지 않았다. 농경 마을이 수천 년 이어진 뒤에 성벽과 신전과 행정 기록이 차례로 얹혔다.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5500년 무렵부터 우바이드 문화의 마을이 퍼졌고, 기원전 4000년 이후 우루크가 다른 취락을 압도하는 규모로 커졌다. 4천년기 후반 이 지역의 유적 수는 정상적인 인구 증가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늘어난다. 문자는 이 도시의 행정에서 나왔다. 쐐기문자 디지털 도서관 기획(CDLI)의 시대 구분에 따르면 원시 설형문자가 나타나는 우루크 4기는 기원전 3350~3200년, 이어지는 우루크 3기는 기원전 3200~3000년이다. 지금까지 나온 원시 설형문자 점토판은 여러 유적을 합쳐 약 5천 점이고, 대부분은 우루크의 에안나 구역에서 나왔다. 초기 기록은 곡물·노동·가축의 출납 장부이며, 음가를 나타내는 표기가 드물게 쓰이기 시작하는 것은 기원전 3200~3000년, 그것이 일관되게 쓰이는 것은 기원전 2600년 이후다.
이 체계가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다. 서아시아 여러 유적에서 나온 도장 자료를 문자 이전 시기와 원시 문자 시기로 나눠 비교한 연구는 이 체계가 기원전 7천년기부터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쓰이던 도장 행정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켈리 외, 2024, Antiquity). 도장 문양과 문자 기호의 형태를 대조한 연구이므로, 두 체계가 이어진다는 결론은 형태의 유사성에 근거한다. 점토 안에 토큰을 넣고 봉한 불라, 숫자만 찍은 점토판처럼 문자 이전의 회계 도구도 4천년기 내내 쓰였다.
나일강 유역에서는 바다리와 나카다 문화가 기원전 4400년부터 이어졌다. 1988년 귄터 드라이어 연구진이 아비도스 움 엘카압 묘역에서 발굴한 U-j 무덤에서 뼈와 상아로 만든 꼬리표 150여 점이 나왔고, 각각에 한 개에서 네 개의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이집트에서 확인된 가장 이른 문자다. 이 꼬리표들에는 두 자음을 나타내는 표기와 발음이 같은 다른 낱말의 그림을 빌려 쓰는 방식이 이미 들어 있다. 무덤은 열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졌고 나카다 IIIA2기에 속하며, 근동에서 들여온 포도주 항아리가 400점 넘게 부장돼 있었다. 연대는 기원전 3300년 안팎으로 보되 정확한 보정값은 연구자마다 다르다. 같은 묘역의 방사성탄소 연대는 괴르스도르프·드라이어·하르퉁이 1998년 Radiocarbon 40권 641~647쪽에 발표했다. 상·하 이집트의 통일은 기원전 3100년 무렵으로 보며, 왕조 목록은 여기서 시작한다.
파키스탄 발루치스탄의 메르가르에서는 기원전 7000년부터 밀과 보리를 재배하고 염소를 기르는 마을이 있었다. 기원전 3300년 이후 초기 하라파기를 거쳐, 기원전 2600~1900년의 전성 하라파기에 하라파·모헨조다로·돌라비라·라키가르히 같은 계획도시가 섰다. 격자형 도로, 표준화된 벽돌 규격, 도시 전체를 훑는 하수 체계가 특징이다. 도량형도 통일돼 있었고, 유적 수는 천 곳이 넘는다. 아프가니스탄 북부 쇼르투가이처럼 본거지에서 천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교역 거점도 있었다. 인장에 새겨진 기호는 기원전 2600년경부터 나타나지만 해독되지 않았고, 그것이 언어를 적은 문자인지 소유와 계량을 나타낸 기호인지도 결정되지 않았다.
중국은 최근 20년 사이에 그림이 가장 크게 바뀐 지역이다. 오랫동안 황허 유역의 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와 갑골문이 출발점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그보다 1,500년 이른 시점에 이미 국가 단계의 사회가 있었다고 본다.
창장 하류의 량주(기원전 3300~2300년)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대규모 흙댐 수리 시설, 계급이 뚜렷하게 나뉜 무덤과 정교한 옥기를 갖췄다. 류빈 연구진은 이 수리 시설의 축조 연대를 5,100년 전으로 보고했고(류 외, 2017, PNAS 114권 13637~13642쪽), 콜린 렌프루와 류빈은 량주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국가 사회일 수 있는 사례로 정리했다(2018, Antiquity 92권 975~990쪽). 판산 묘역의 상위 무덤에는 옥·비단·상아·칠기가 부장됐고 하위 무덤에는 토기만 나온다. 유네스코는 2019년 이곳을 세계유산(등재번호 1592)으로 올리면서 벼농사를 기반으로 한 신석기 후기의 초기 지역국가로 규정했다.
황허 중류에서는 룽산 문화(기원전 2400~1900년)의 성곽 취락들이, 산시성 북부에서는 400헥타르가 넘는 석성 스마오(기원전 2300~1800년)가 확인됐다. 스마오는 중국 문명의 변두리로 여겨지던 황토고원 북부에 있고, 중앙의 궁전 대지를 두 겹의 돌 담장이 둘러싼다. 굽은 통로를 만든 성문, 문루, 모서리 망루를 갖춘 방어 체계이며, 성벽을 쌓기 전에 사람을 제물로 바친 흔적과 담장 돌 사이에 박아 넣은 옥기가 나왔다.
그 뒤를 잇는 얼리터우(기원전 1900~1500년)는 궁전 구역과 청동 주조 공방을 갖췄고, 문헌의 하나라와 연결짓는 견해가 많지만 동시대 문자 기록이 없어 확인되지 않는다. 기원전 2000년 무렵 저지대의 룽산계 국가들이 잇따라 무너진 뒤에 얼리터우가 이차적으로 형성된 국가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문자로 인정받는 갑골문은 기원전 1250년 무렵 상나라 후기에야 나타난다.
페루 중부 해안의 카랄-수페(기원전 3000~1800년)에는 높이 28미터의 계단식 피라미드와 원형 광장, 계획된 도시 구획이 있다. 이집트 사카라 계단 피라미드와 비슷하거나 더 이른 시기다. 이 지역의 취락은 한 곳이 아니어서, 반두리아와 아스페로를 비롯해 서른 곳 안팎의 중심지가 확인됐다. 경제 기반은 곡물 잉여보다 어업과 목화 재배 쪽에 가까웠다. 목화로 그물과 자루를 만들었고, 그 자루에 돌을 담아 기단을 쌓았다. 이곳에는 토기도 문자도 없었다. 도시와 기념 건축이 문자나 토기 없이도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림 3. 각 지역에서 농경 마을 단계부터 국가 단계까지의 시기 구분이다. 메소포타미아의 ‘통일 왕조기’는 아카드·우르 제3왕조·고바빌로니아를 묶어 표시했다. 안데스는 네 문명 목록에 들어가지 않지만 비교를 위해 함께 실었다.
문자 역시 한 곳에서 발명돼 퍼진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경우와 그럴 수 없는 경우를 나누면 다음과 같다.
메소포타미아의 원시 설형문자(기원전 3350년경)와 이집트의 아비도스 꼬리표(기원전 3300년경)는 시차가 백 년 안팎이다. 4천년기 후반 두 지역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는 여럿 있다. 이집트인은 원통형 도장을 받아들였고, 벽감을 낸 벽돌 건축을 지었으며, 위세품에 외래 도상을 새겼다. 그러나 그 접촉을 U-j 무덤과 정확히 시간 순으로 맞출 수 있는 자료는 아직 없다. 자극을 받아 만들었는지 독립적으로 만들었는지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중국의 갑골문(기원전 1250년경)과 메소아메리카의 문자는 서남아시아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없다. 메소아메리카에서 가장 이른 사례는 1999년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엘 카스카할의 채석장에서 도로 공사 중에 나온 사문석 판이다. 가로 36센티미터, 세로 21센티미터, 두께 13센티미터에 무게 11.5킬로그램이고, 한 면에 62개의 기호가 새겨져 있다. 기호는 28종을 쓰고, 그중 일부는 한 면에서 네 번까지 반복한다. 연구진은 함께 나온 토기와 소상을 근거로 올메카의 산로렌소기 말, 곧 기원전 900년 무렵으로 보았다(로드리게스 마르티네스 외, 2006, Science 313권 1610~1614쪽). 반복 순서가 있고 읽는 방향을 추정할 수 있으므로 도상이 아닌 표기 체계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출토 맥락이 교란된 상태였으므로 진위와 연대를 유보하는 연구자도 있다. 이보다 확실한 자료는 기원전 500년 무렵의 사포텍 문자다.
인더스는 미결로 남아 있다. 기호의 개수와 배열은 표기 체계의 특징을 보이지만 긴 문장이 없고 이중 언어 자료도 없다. 이 기호가 문자로 판명되면 독립 발생 횟수는 다섯 번이 된다.
기원전 2200년 무렵 서아시아에서 인도까지 여러 지역에서 건조화가 진행됐고, 이를 4.2킬로년 사건이라 부른다. 여러 문명의 쇠퇴가 이 시기에 겹치지만, 무너진 방식은 지역마다 달랐다.
인더스의 경우 리비우 조산 연구진이 하천 지형과 연대를 함께 조사해 그림을 바꿨다(조산 외, 2012, PNAS 109권 E1688~E1694쪽). 5천 년 전 이후 건조화가 심해지면서 하라파 영역의 하천 지형은 오히려 안정됐다. 펀자브의 히말라야계 큰 강들은 하상을 깎아내리기를 멈췄고, 신드의 인더스 충적 능선에서는 퇴적이 느려졌다. 홍수 강도가 줄어든 이 상태가 처음에는 집약 농업에 유리해 4천 5백 년 전 도시화를 부추겼다. 그 뒤 몬순이 더 약해지자 범람 농법과 천수 농법이 모두 어려워졌다. 3천 900년 전부터 총 취락 면적과 개별 취락 규모가 줄고, 유적 분포가 몬순이 남아 있는 동쪽의 편자브 북부·하리아나·우타르프라데시로 옮겨 간다.
같은 연구는 오래된 주장 하나를 정리했다. 히말라야 빙하에서 물을 받는 큰 강이 하라파 중심부를 적셨고 그것이 문헌 속 사라스바티 강이라는 견해가 있었는데, 홀로세 동안 그 지역에서 활동한 하천은 몬순으로만 유지되는 계절 하천뿐이었다는 것이 조산 연구진의 결론이다.
량주는 더 이른 시점에 끝났다. 기원전 2300년 무렵 도시가 버려지고 수리 시설이 방치된다. 문화층 사이에 진흙과 모래자갈 층이 끼어 있고 그 안에 나무가 묻혀 있어, 홍수와 해수면 상승을 원인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중국 저지대에서는 기원전 2000년 무렵 룽산계 국가들이 잇따라 쇠퇴했고, 그 공백 위에서 얼리터우가 자리를 잡는다.
같은 시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정치 체제가 재편됐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아카드 제국은 기원전 22세기에 무너졌지만 우르 제3왕조가 이었고, 이집트는 고왕국이 끝난 뒤 제1중간기를 거쳐 중왕국으로 이어졌다. 같은 기후 사건을 맞고도 어떤 곳은 도시를 버렸고 어떤 곳은 왕조만 바뀌었다.
한국 교과서가 쓰는 ‘세계 4대문명’은 학술 용어가 아니다. 이 분류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 서술에서 쓰이며, 서구 학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기원에 관해서는 두 갈래 설명이 있다. 무라이 아쓰시는 2009년 『사회과교육』 46권 4호 116~121쪽에서 이 말이 일본 고고학자 에가미 나미오가 만든 조어라고 정리했다. 에가미의 동료 스기야마 마사아키가 에가미 본인에게 그렇게 들었다고 회고한 것이 근거이며, 문헌으로 확인되는 가장 이른 용례는 에가미가 근무하던 야마카와출판사가 1952년에 낸 교과서 『재정 세계사(再訂世界史)』다. 다른 갈래는 청나라 말 지식인 량치차오가 1900년에 제시했다고 보는 견해로, 이시카와 요시히로가 2019년 『사림』 102권 1호 152~187쪽에서 중국 근현대의 문명사관 수용 과정을 다루며 이 문제를 검토했다. 어느 쪽이든 이 틀은 20세기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졌고, 한국에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학을 거쳐 들어왔다.
서구 학계에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틀이 있다. 미국 이집트학자 제임스 헨리 브레스티드는 1916년 『고대(Ancient Times)』에서 지중해 동안에서 시작해 아라비아 북쪽을 지나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반원형 지대에 ‘초승달 모양의 비옥한 지대(Fertile Crescent)’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는 1936년 『인간은 스스로를 만든다』에서 신석기 혁명과 도시 혁명이라는 용어를 썼고, 1950년 『타운 플래닝 리뷰』 21권 3~17쪽에 실은 논문에서 최초의 도시를 가려내는 열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기준은 규모와 인구 밀도, 전업 장인과 상인과 사제의 존재, 잉여의 집중, 기념 건축, 지배 계급, 문자, 산술과 천문과 역법, 예술의 양식화, 원거리 교역, 그리고 혈연 대신 거주지에 근거한 소속이었다. 차일드는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에 놓고 이집트, 인더스, 유카탄의 마야와 비교했다. 즉 넷을 세는 방식은 동아시아에만 있던 것이 아니다.
지금 학계에서 문명이 독립적으로 발생한 곳을 셀 때는 보통 여섯 곳을 꼽는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중국에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가 더해진다. 넷으로 줄이면 아메리카 대륙의 두 사례가 통째로 빠진다.
이 틀이 가리는 것이 셋 더 있다. 첫째, 네 곳이 같은 시기에 같은 방식으로 출발했다는 인상을 준다. 메소포타미아에 문자가 나타난 뒤 중국에서 갑골문이 나오기까지 2,100년이 걸렸고, 그 사이 인더스의 기호는 지금도 읽히지 않는다. 둘째, 큰 강 유역이라는 조건을 필수 요건처럼 만든다. 카랄-수페는 큰 강이 아닌 좁은 해안 계곡에서 일어섰고, 괴베클리 테페는 강 유역 농경과 무관한 고지대에 있다. 셋째, 한 지역 안의 여러 중심을 지운다. 중국의 사례가 분명하다. 량주는 창장 하류에, 스마오는 황허 상류에, 룽산은 황허 중류에 있었고 서로 다른 계보를 가진다. ‘황허 문명’이라는 단일 계보로 이어 붙이기 어렵다.
기준을 바꾸면 목록도 바뀐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차일드처럼 문자를 필수 요건으로 삼으면 카랄-수페는 문명에 들지 못한다. 중국의 문명탐원공정은 문자와 청동기와 도시라는 전통적 기준 대신 국가의 출현을 기준으로 삼았고, 그 기준에서 량주는 문명 단계에 들어간다. 어느 기준이 옳은가는 무엇을 문명이라 부르기로 하느냐에 달렸고, 자료만으로는 결정되지 않는다.
비교의 틀로서 네 지역을 함께 놓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서로 떨어진 곳에서 비슷한 규모의 사회가 생겨난 과정을 견주는 것은 여전히 유용하다. 발생지의 목록과 발생의 순서가 이 넷으로 닫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함께 전달되지 않을 때 문제가 된다.
연표에 숫자를 적어 넣으면 모두 확정된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 다룬 항목 가운데 논쟁이 진행 중인 것을 따로 모으면 다음과 같다.
| 항목 | 한쪽 주장 | 반대 주장 |
|---|---|---|
| 로메크위 3 석기 | 330만 년 전 석기로, 호모속보다 앞선다 | 유물이 비탈을 따라 더 젊은 지층에서 쓸려 내려왔다 |
| 사피엔스·데니소바 분기 | 유전체 분석으로 70만~50만 년 전 | 윈시안 2호 두개골 형태 분석으로 132만 년 전 |
| 제벨 이르후드의 분류 | 가장 이른 사피엔스 계통 | 호모 안테세소르에서 이어진 원시 형질일 수 있다 |
| 아프리카 안의 유전 변이 | 사라진 고형 인류와의 혼혈 흔적이다 | 원래 약하게 나뉘어 있던 줄기 구조의 흔적이다 |
| 호모 날레디의 매장 | 시신을 의도적으로 묻고 벽에 기호를 새겼다 | 토양 혼합 증거가 재현되지 않는다 |
| 미슬리야 위턱뼈 | 열형광 연대로 평균 18만 5천 년 전 | 우라늄 계열 연대의 확실한 하한은 6만~7만 년 전 |
| 오스트레일리아 진입 | 마제드베베 6만 5천 년 전 | 혼혈 시점이 4만 5천~4만 9천 년 전이므로 그보다 늦다 |
| 아메리카 진입 | 화이트샌즈 2만 3천~2만 1천 년 전 | 같은 층에서 석기가 나오지 않는다 |
| 이집트 문자의 기원 | 메소포타미아의 자극을 받았다 | 접촉 시점을 U-j 무덤과 맞출 자료가 없다 |
| 카스카할 판 | 기원전 900년의 메소아메리카 최초 문자다 | 출토 맥락이 교란돼 진위와 연대를 확정할 수 없다 |
| 인더스 인장 기호 | 언어를 적은 문자다 | 소유와 계량을 나타내는 기호 체계일 뿐이다 |
| 얼리터우와 하나라 | 문헌의 하나라에 해당한다 | 동시대 문자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
| 농경과 정주의 선후 | 공동 노동과 의례가 먼저, 농경이 뒤따랐다 | 식물 이용이 점차 깊어지며 양쪽이 함께 진행됐다 |
반면 아래 연대는 서로 다른 방법과 서로 다른 연구진이 같은 값을 가리키는 항목이다.
| 연대 | 사건 | 지역 |
|---|---|---|
| 440만 년 전 | 아르디피테쿠스, 직립보행의 이른 증거 | 에티오피아 |
| 370만 년 전 | 라에톨리 발자국 | 탄자니아 |
| 320만 년 전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루시’ | 에티오피아 |
| 280만 년 전 | 가장 이른 호모속 화석(레디-게라루) | 에티오피아 |
| 261만~258만 년 전 | 올도완 석기(보콜 도라 1) | 에티오피아 |
| 190만 년 전 | 호모 에렉투스 등장 | 아프리카 |
| 180만 년 전 | 드마니시, 아프리카 밖 가장 이른 호모 | 조지아 |
| 176만 년 전 | 아슐리안 주먹도끼 | 케냐 |
| 110만~94만 년 전 | 윈시안 2호 두개골 | 중국 |
| 77만 3천 년 전 | 토마스 채석장 화석 | 모로코 |
| 43만 년 전 | 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 네안데르탈 계통의 이른 화석 | 스페인 |
| 33만 5천~24만 1천 년 전 | 호모 날레디 | 남아프리카 |
| 31만 5천 년 전 | 제벨 이르후드, 가장 이른 사피엔스 화석 | 모로코 |
| 23만 3천 년 전 | 오모 I, 동아프리카의 이른 사피엔스 | 에티오피아 |
| 14만 6천 년 전 | 하얼빈 두개골, 유일한 데니소바인 머리뼈 | 중국 |
| 12만~13만 5천 년 전 | 현생 집단 사이의 가장 이른 분기 | 아프리카 |
| 10만 년 전 | 블롬보스 동굴 안료 제작 도구 | 남아프리카 |
| 7만 3천 년 전 | 블롬보스 동굴 오커 격자무늬 그림 | 남아프리카 |
| 4만 9천~4만 5천 년 전 | 네안데르탈인과의 혼혈, 단 한 번 | 서아시아 또는 유럽 |
| 4만 5천 820~4만 3천 650년 전 | 바초 키로, 유럽의 사피엔스 | 불가리아 |
| 4만 년 전 | 네안데르탈인 소멸 | 유라시아 |
| 기원전 9675~9314년 | 괴베클리 테페 D 구역 회반죽 연대 | 튀르키예 |
| 기원전 9000~8000년 | 염소·양·돼지·소의 가축화 | 북부 메소포타미아 |
| 기원전 8700년경 | 옥수수 재배 | 멕시코 발사스 유역 |
| 기원전 5000~4400년 | 쿡 습지의 둔덕 재배 | 뉴기니 고지대 |
| 기원전 3350~3200년 | 원시 설형문자(우루크 4기) | 메소포타미아 |
| 기원전 3300년 안팎 | 아비도스 U-j 무덤 꼬리표 | 이집트 |
| 기원전 3300~2300년 | 량주, 성벽 도시와 수리 시설 | 중국 |
| 기원전 3000~1800년 | 카랄-수페 | 페루 |
| 기원전 2600~1900년 | 전성 하라파기, 계획도시 | 인더스 |
| 기원전 2300~1800년 | 스마오 석성 | 중국 |
| 기원전 1900~1500년 | 얼리터우, 궁전과 청동 주조 | 중국 |
| 기원전 1250년 | 갑골문 | 중국 |
| 기원전 900년경 | 카스카할 판, 메소아메리카의 이른 기호 체계 | 멕시코 |
앞의 자료는 한 방향을 가리킨다. 사람의 기원도 문명의 기원도 한 지점에서 시작해 퍼져 나가지 않았고, 여러 곳에서 겹쳐 일어났다.
사피엔스의 기원 쪽에서 근거는 넷이다. 가장 이른 사피엔스 화석이 동아프리카가 아닌 모로코에서 나왔고, 동아프리카 화석의 연대는 위로 올라갔으며, 유전체 모형은 오랫동안 약하게 나뉘어 있던 여러 줄기를 지목하고, 계통이 갈라진 시점은 화석과 유전체가 두 배 넘게 차이 나는 값을 내놓는다. 같은 시기 아프리카 남부에는 뇌가 작은 호모 날레디가, 동남아시아 섬에는 키가 작은 두 종이 함께 살아 있었다. 아프리카를 벗어난 시점도 하나가 아니었다. 미슬리야와 아피디마의 이른 진출은 흔적을 남기지 못했고, 오늘날 비아프리카계 인구는 4만 9천~4만 5천 년 전 단 한 번의 네안데르탈 혼혈을 공유하는 한 집단에서 갈라졌다.
문명의 기원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괴베클리 테페는 농경이 없는 상태에서 기원전 9600년대에 거대 석조 구조물이 세워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농경은 서남아시아·창장·황허·발사스·뉴기니·안데스·사헬·북아메리카 동부에서 각각 다른 작물로 시작됐다. 문자는 적어도 네 번, 인더스 기호가 판명되면 다섯 번 따로 만들어졌다. 량주와 스마오와 룽산은 한 지역 안에서도 중심이 여럿이었음을, 카랄-수페는 문자도 토기도 없이 도시가 설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무너질 때도 인더스는 도시를 버리고 동쪽으로 옮겨 갔지만 이집트는 왕조만 바뀌었다.
남은 물음은 연대보다 기준에 걸려 있다. 무엇을 국가로 볼 것인가에 따라 중국의 출발점은 량주(기원전 3300년)와 얼리터우(기원전 1900년) 사이에서 1,400년을 오간다. 문자를 요건으로 삼으면 카랄-수페는 목록에서 빠지고, 도시와 기념 건축을 요건으로 삼으면 들어온다. 인더스 기호가 언어를 적은 것으로 판명되면 문자의 발생지 수가 바뀐다. 화석 형태와 유전체가 내놓는 분기 연대의 간격도 어느 한쪽이 방법을 고칠 때까지 좁혀지지 않는다. 지금 연표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자리는 오래전에 발굴된 자료를 새 기법으로 다시 재는 쪽이다. 윈시안 2호는 1990년에, 하얼빈 두개골은 1933년에, 오모 I은 1967년에, 아비도스 U-j 무덤은 1988년에 이미 땅에서 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