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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라는 범주는 언제 만들어졌는가 — 라틴어 렐리기오에서 근대의 '세계 종교'까지

종교의 기원을 묻기 전에 무엇을 종교로 셀지 정해야 하는데, 그 범주 자체가 근세 유럽에서 만들어진 분류라는 연구가 쌓여 있다. 이 논증이 옳다면 기원 논쟁의 상당 부분은 낱말의 범위를 두고 벌이는 다툼이 된다.

2026년 9월 12일

고대 문헌을 한국어나 영어로 옮긴 책을 펼치면 '종교'라는 낱말이 자주 나온다. 로마의 문헌에서는 렐리기오(religio)를, 그리스 문헌에서는 트레스케이아(thrēskeia)를, 아랍어 문헌에서는 딘(dīn)을 그렇게 옮긴다. 번역만 보면 고대인도 우리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낱말을 갖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런데 번역어를 걷어내고 라틴어 본문의 용례를 따라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라틴어 렐리기오는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기독교를 가리키는 데 쓰였지만, 같은 문헌에서 그 기독교를 구성하는 여러 예배 관행 하나하나도 각각 렐리기오라 불린다. 다른 라틴어 문헌에서 렐리기오는 신들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 가까운 결함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나의 낱말이 오늘날의 '종교'와 '한 종교의 개별 의례'와 '강박적 성향'을 동시에 덮고 있다면, 그 낱말과 지금의 '종교'를 같은 것으로 놓기 어렵다.

키케로가 만든 어원과 락탄티우스가 뒤집은 어원

렐리기오가 어디서 왔는지를 두고 고대인들 자신이 다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45년에 쓴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De natura deorum) 2권 28장 72절에서 이렇게 적는다.

Nam qui totos dies precabantur et immolabant, ut sibi sui liberi superstites essent, superstitiosi sunt appellati, quod nomen patuit postea latius; qui autem omnia quae ad cultum deorum pertinerent diligenter retractarent et tamquam relegerent, ii sunt dicti religiosi ex relegendo, tamquam elegantes ex eligendo, tamquam ex diligendo diligentes, ex intellegendo intellegentes; his enim in verbis omnibus inest vis legendi eadem quae in religioso. Ita factum est in superstitioso et religioso alterum vitii nomen alterum laudis.

온종일 기도하고 제물을 바치며 제 자식이 저보다 오래 살아남기를 빈 사람들은 수페르스티티오시라 불렸고, 이 이름은 나중에 더 넓게 쓰이게 되었다. 반면에 신들을 섬기는 일에 딸린 모든 것을 꼼꼼히 되짚고 말하자면 다시 읽어 낸 사람들은 '다시 읽다'에서 나온 렐리기오시라 불렸으니, '고르다'에서 엘레간테스가 나오고 '아끼다'에서 딜리겐테스가 나오며 '알아듣다'에서 인텔레겐테스가 나오는 것과 같다. 이 낱말들에는 모두 렐리기오수스에 든 '읽다'라는 힘이 똑같이 들어 있다. 그리하여 수페르스티티오수스는 흠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고 렐리기오수스는 칭찬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키케로,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 2권 28장 72절. 라틴어 본문은 페르세우스 디지털 도서관 수록 교정본. 한국어 번역은 직접 옮겼다.

키케로가 구분한 두 낱말을 보면 뜻의 좌표가 잡힌다. 수페르스티티오수스는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이고, 렐리기오수스는 신들을 섬기는 절차를 빠짐없이 꼼꼼하게 챙기는 사람이다. 두 낱말이 가르는 기준은 태도의 과부족이다. 신에 대해 무엇을 믿느냐는 여기에 들어오지 않는다.

기독교 저술가 락탄티우스는 4세기 초에 쓴 『신적 교훈』(Divinae institutiones) 4권 28장에서 이 어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Hoc uinculo pietatis obstricti deo et religati sumus: unde ipsa religio nomen accepit, non ut Cicero interpretatus est a relegendo. Haec interpretatio quam inepta sit, ex re ipsa licet noscere. Nam si in isdem diis colendis et superstitio et religio uersatur, exigua uel potius nulla distantia est.

우리는 이 경건의 끈에 붙들려 신에게 묶여(religati) 있다. 렐리기오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지, 키케로가 풀이한 대로 '다시 읽음'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풀이가 얼마나 어설픈지는 사안 자체로 알 수 있다. 같은 신들을 섬기는 일에 미신과 렐리기오가 함께 걸려 있다면, 둘 사이의 거리는 아주 작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다.

락탄티우스, 『신적 교훈』 4권 28장. 라틴어 본문은 페르세우스 소속 Capitains 텍스트 서버 수록 교정본. 한국어 번역은 직접 옮겼다.

락탄티우스가 '다시 읽다'(relegere) 대신 '묶다'(religare)를 어원으로 제시한 배경에는 신학적 요구가 있었다. 신과 사람을 잇는 끈이라는 뜻을 얻어야 기독교의 렐리기오가 이교의 렐리기오와 종류부터 달라진다. 어원 논쟁이 두 세기 넘게 이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이 낱말이 고정된 지시 대상을 갖지 않았다는 정황이다.

고대에는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가르는 구획이 없었다

브렌트 농브리는 2013년 예일대학출판부에서 낸 『Before Religion: A History of a Modern Concept』에서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뤘다. 농브리는 미국 텍사스 출신으로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로마 시대 이탈리아와 이스라엘 유적에서 10년 넘게 발굴에 참여한 고대 기독교 연구자다. 현재 오슬로의 노르웨이 신학·종교·사회대학원 종교사 교수로 있다.

농브리의 논증은 두 단계로 간다. 앞부분에서는 고대 문헌에 정치나 경제나 학문과 구분되는 '종교적' 영역이 따로 없었음을 용례로 보인다. 뒷부분에서는 그 영역을 만들어 낸 근대 유럽의 과정을 추적한다.

성과 속의 구분 사람의 삶을 종교적인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 나누고, 종교는 개인의 내면과 사적 영역에 속하며 정치·경제·학문은 거기서 분리된다고 보는 구도를 가리킨다. 이 구도에서 국가는 종교에 중립적이어야 하고, 신앙은 각자가 고르는 것이 된다. 오늘날 이 구도는 자명해 보이지만,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제의와 통치와 친족과 시민권이 한 덩어리로 묶여 있었으므로 이런 분리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종교의 탄생'으로 자주 지목되는 고대의 장면들을 농브리는 하나씩 재검토한다. 기원전 2세기 마카베오 반란은 유대교가 하나의 정체성이자 종교로 확립된 순간으로 자주 이야기되는데, 농브리는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유대화' 당파가 '헬라화' 당파를 이긴 일로 보는 쪽이 정확하다고 본다. 두 당파를 가른 쟁점은 어느 방식으로 살 것인가였고, 여기에는 언어와 복장과 교육과 정치 노선이 함께 들어 있었다.

키케로에게서도 렐리기오는 시민적·종족적 정체성과 얽혀 있다. 4세기 초의 에우세비오스에게서는 기독교가 아닌 모든 집단이 순수하고 오래된 기독교적 과거로부터의 일탈로 취급되는데, 이 구도에서 다른 집단은 잘못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다. 농브리가 정리하는 바에 따르면, 전근대 기독교인들은 남들을 나쁜 기독교인이거나 이교도로 분류했다.

범주를 만든 세 가지 사건

그렇다면 지금의 종교 개념은 어디서 왔는가. 농브리는 세 가지 계기를 지목한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 내부의 분열, 유럽인과 식민지 원주민의 조우, 그리고 국민국가의 형성이다.

첫째 계기부터 보면, 기독교가 여러 교파로 쪼개지고 각 교파가 서로를 이단으로 몰면서, 교파들을 한 단계 위에서 묶어 비교할 수 있는 상위 범주가 필요해졌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며 종교는 비슷한 종교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자발적 결사라는 관념이 퍼졌고, 종교와 세속을 가르는 구획이 함께 등장했다. 농브리는 마르실리오 피치노 같은 이탈리아 신플라톤주의자에서 장 보댕을 거쳐 존 로크에 이르는 경로를 따라가며 이 개인화된 종교 개념이 완성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둘째 계기는 탐험가와 상인과 선교사가 유럽으로 보낸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들은 낯선 민족의 관습을 기술하면서 기독교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늘 함께 적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들도 이 비교에 끌려 들어왔다. 예수회 선교사 호세 데 아코스타는 16세기 후반에 쓴 널리 읽힌 보고서에서, 멕시코인의 우상 숭배를 그리스인과 라틴인이 포이보스와 메르쿠리우스와 유피테르와 미네르바와 마르스의 우상을 만든 것에 견주었다. 17세기 후반 리처드 블롬은 아메리카 메릴랜드 원주민이 우상을 전쟁터에 가지고 다니며 그것에 조언을 구하는 모습을 로마인이 신탁에 묻던 방식에 견주었다.

셋째 계기인 국민국가의 형성은 앞의 둘을 제도로 고정했다. 국가가 종교에 중립적이려면 무엇이 종교인지 법으로 확정해야 한다. 확정하는 순간 종교는 국가가 관리하는 분류 항목이 된다.

고대 그리스 종교와 메소포타미아 종교는 근대의 산물이다

농브리의 책에서 가장 구체적인 사례는 '고대 종교들'이 만들어진 경위다.

5세기부터 16세기까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을 떠올린 유럽인 대부분은 그들을 사탄의 수하인 악령으로 여겼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만신전이 의로운 신들(dii iusti)을 담고 있지 않고 불경한 악령들(daemones impii)이자 악한 영들(maligni spiritus)로 채워져 있다고 선언했다. 교육받은 층에서는 두 가지 견해가 이와 섞여 있었다. 하나는 그 신들이 아주 이른 시기에 신으로 여겨지게 된 옛 영웅이라는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신들과 그 이야기가 미덕과 악덕을 나타내는 무해한 알레고리라는 설명이다.

이 신들이 '종교'의 구성원으로 승격되는 것은 식민지 조우 이후다. 1533년 스페인 침략자들이 리마 인근 파차카막 신전을 약탈하고 중심 신상을 부순 직후의 보고서에서 파차카막은 우상 속에서 말하는 악마였다. 16세기 말 아코스타에게서 파차카막은 원주민이 창조자에게 붙인 이름이 되고, 17세기 초 잉카 공주와 스페인 정복자 사이에서 태어난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에게서는 원주민이 알아본 참된 전능한 신이 된다. 18세기가 되면 파차카막은 베르나르 피카르의 『종교 의례와 관습』 같은 편람에서 '페루인의 종교'의 중심 인물로 자리 잡는다. 약 100년 사이에 악마가 신이 되고 다시 한 종교의 항목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종교는 자료보다 범주가 먼저 생긴 사례다. 알렉산더 로스가 1653년에 낸 『Pansebeia』에는 '고대 바빌로니아인의 종교들'이라는 절이 있는데, 여기서 벨은 유피테르로, 아스타로트는 유노로 등치된다. 로스가 댄 출처는 디오도로스와 필로스트라토스와 에우세비오스와 스칼리게르였다. 쐐기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쐐기문자 해독은 19세기 중반 헨리 크레스위크 롤린슨이 베히스툰 비문의 고대 페르시아어 부분을 해독하면서 시작됐고, 프랑스와 영국의 체계적 발굴도 1840년대 초에야 시작됐다. 범주가 먼저 있었고 자료가 나중에 그 칸을 채웠다.

영국박물관이 쐐기문자 점토판을 분류할 때 H는 역사, R은 종교로 표시해 보관했다는 사실을 농브리는 예로 든다. 1898년 모리스 재스트로는 701쪽 분량의 『The Religion of Babylonia and Assyria』를 냈고, 책은 신들과 종교 문헌과 종교 건축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책은 재스트로 자신이 편집한 '종교사 편람' 총서의 한 권이었다.

배태된 종교라는 표현이 감추는 것

고대 지중해 세계를 연구하는 학자 상당수는 종교가 그 문화에 고유한 개념이 아니었음을 안다. 그러면서도 '고대 종교'라는 말을 계속 쓴다. 농브리는 이 상태를 유지시키는 표현 하나를 지목한다.

배태된 종교(embedded religion) 고대 사회에서는 종교가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지 않고 정치·경제·친족 등 삶의 모든 국면에 스며들어 있었다는 뜻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계몽주의 이후의 분류가 고대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짚어 준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문제는 이 표현이 '고대에 종교가 있었고 다만 배태돼 있었다'로 읽힌다는 데 있다.

농브리는 이 표현이 서술과 재서술을 섞어 놓는다고 지적한다. 어떤 개념을 서술적으로 쓰면 대상 문화가 실제로 그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셈이 되고, 재서술적으로 쓰면 대상 문화에 없던 개념을 연구자가 편의상 씌우는 셈이 된다. '배태된 종교'를 말하는 학자들은 서술적 문체로 글을 쓰면서 실제로는 재서술을 하고 있다. 그 결과 종교는 모든 문화에 늘 있었던 무엇으로 다시 기입된다. 농브리는 고대 종교를 계속 말하려면 그때 말하는 것이 근대의 무엇임을 늘 의식해야 하며, 고대인이라면 알아보지 못할 것을 이름 붙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조약 협상이 낱말을 만들었다

한국어와 중국어와 일본어의 '종교'(宗敎)도 같은 계보에 속한다. 제이슨 아난다 조지프슨은 2012년 시카고대학출판부에서 낸 『The Invention of Religion in Japan』에서 이 낱말의 성립을 추적했다.

조지프슨의 출발점은 1853년 매슈 페리의 함대가 일본에 온 사건이다. 이후 185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와 조약 협상이 이어졌는데, 조약문에는 'religion'과 '종교의 자유'에 해당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일본에는 불교와 유교와 신도를 한데 묶어 부르는 상위 범주가 없었으므로, 협상을 진행하려면 그 낱말부터 만들어야 했다. 조지프슨의 서술에 따르면, 여러 후보가 경합한 끝에 슈쿄(宗敎)가 자리를 잡는 과정은 매끄럽지 않았고 상당한 논쟁을 거쳤다. 조지프슨은 메이지 초기 지식인들의 논설을 세밀하게 읽어 이 경합을 재구성한다.

일본에서 정착한 이 번역어는 중국과 한국으로 수출되어 두 나라에서도 지배적인 용어가 되었다. 일본에서 이루어진 해석이 동아시아 전역의 전통 분류를 다시 짜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신교(信敎)와 종교(宗敎) 메이지 헌법 체제에서 자유가 보장된 대상은 신교, 곧 내면의 믿음이었고 종교, 곧 여러 교단과 종파를 포괄하는 일반 범주가 아니었다. 일본 신민은 무엇이든 믿을 자유를 가졌지만 정부는 그 공적 활동을 단속할 권한을 남겨 두었다. 조지프슨은 이 구분의 효과로 두 사례를 든다. 렌몬쿄와 덴리쿄는 1890년대에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았고, 법적 종교 정의에 맞도록 교리와 의례를 조정해야 했다. 덴리쿄는 살아남았고 렌몬쿄는 사라졌다.

조지프슨이 정리하는 결과는 분류의 삼분이다. 국가 신도는 종교 항목에서 빠져 국민 이념으로 격상됐고, 불교와 기독교 등은 종교 항목에 들어가 관용의 대상이 됐으며, 토착 무당과 여성 영매의 관행은 미신으로 밀려나 관용의 범위 밖에 놓였다. 무엇을 종교로 세느냐가 곧 무엇을 보호하고 무엇을 단속하느냐를 정했다.

정의를 찾는 일이 왜 권력을 지우는가

탈랄 아사드는 1993년 존스홉킨스대학출판부에서 낸 『Genealogies of Religion: Discipline and Reasons of Power in Christianity and Islam』의 첫 장에서 다른 각도로 같은 문제를 다뤘다. 아사드의 표적은 클리퍼드 기어츠가 제시한 보편적 정의였다. 기어츠의 글 「문화 체계로서의 종교」는 마이클 밴턴이 엮어 1966년 런던 태비스톡에서 낸 『Anthropological Approaches to the Study of Religion』 1~46쪽에 실렸다. 아사드의 비판은 먼저 1983년 학술지 『Man』 18권 237~259쪽에 실렸고, 10년 뒤 단행본의 첫 장으로 다시 실리면서 더 널리 읽혔다.

기어츠의 정의는 종교를 상징 체계로 본다. 상징들이 사람에게 강력하고 지속적인 기분과 동기를 심고, 존재 전반의 질서에 관한 관념을 만들어 내며, 그 관념에 사실성의 후광을 입혀 기분과 동기가 실재처럼 보이게 한다는 구조다. 기어츠의 논증에서 사람은 존재의 일반적 질서를 깊이 필요로 하며, 종교 상징은 그 필요를 채우는 기능을 한다.

아사드는 이 정의가 권력을 시야에서 지운다고 반박한다. 종교를 상징에 연결된 의미의 문제로 보는 시각 자체에 특정한 기독교적 역사가 붙어 있으며, 그 역사를 잊으면 종교가 권력과 얼마나 밀접했는지도 함께 잊힌다. 아사드는 종교의 본질을 찾는 이론적 작업이 종교를 권력의 영역에서 개념적으로 분리하도록 유도한다고 적는다. 아사드가 겨냥하는 물음은 정의의 작동이다. 어떤 발화와 관행이 종교로 인정받으려면 무엇이 그것에 결부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인정을 누가 집행하는가.

아사드는 중세 유럽 기독교를 직접 연구한 사람이고, 그 자료 위에서 논증을 편다. 중세의 수도 규율에서 믿음은 내면의 상태보다 훈련된 몸의 실천 쪽에 놓여 있었고, 무엇이 올바른 실천인지는 교회 권력이 정했다. 종교를 사적 신념으로 보는 시각을 중세에 적용하면 이 구조가 통째로 보이지 않게 된다.

낱말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무엇까지 끌어낼 수 있는가

지금까지의 논증을 끝까지 밀면 비교 연구가 불가능해진다. 고대 그리스에 '종교'라는 낱말이 없었으므로 고대 그리스 종교를 말할 수 없다면, 같은 논리로 고대 그리스에 '경제'라는 낱말도 없었으므로 고대 그리스 경제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아테네인은 물건을 사고팔았고 곡물 수입에 도시의 존망을 걸었다. 낱말의 부재는 현상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농브리 자신도 종교라는 용어를 아예 버리자고까지 나가지는 않는다. 그의 제안은 이 범주가 어떤 국면을 밝혀 줄 때 전략적으로 쓰되, 그 출처를 솔직히 인정하고 자료에서 저절로 솟아난 것처럼 굴지 말자는 쪽이다. 러셀 매커천의 정리를 농브리가 인용하는 대목이 이 지점을 요약한다. 국가나 개인이나 시민 같은 개념이 지금 우리의 자기 이해에 워낙 기본적이어서 우리는 그것을 시간적으로 과거에, 공간적으로 다른 문화에 무심코 투사한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며, 그런 투사는 중립적 분류에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사회 세계를 자명하고 필연적인 것으로 되비춰 준다.

이 주장에 반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사드의 기어츠 비판에 대해서는, 기어츠가 쓴 방법과 그가 다룬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비판이라는 재반론이 있다. 아사드의 상대주의적 입장을 끝까지 밀면 어떤 정의도 불가능해지고, 그러면 비교 자체가 학문적 작업으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현재 종교인류학 연구자 상당수는 포괄적 정의를 시도하지 않고, 무엇이 종교로 분류되고 무엇이 배제되는지를 관찰하고 기술하는 쪽으로 옮겨 갔다.

결론 — 기원을 묻기 전에 범주의 출처를 확인해야 한다

종교라는 범주는 보편 개념이 아니라 역사를 가진 분류다. 키케로와 락탄티우스가 렐리기오의 어원을 두고 다툰 것은 그 낱말이 고정된 대상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고, 전근대 기독교인이 남들을 다른 종교의 신자로 분류하지 않은 것은 그 분류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분류는 종교개혁 이후의 교파 분열과 식민지 조우와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세 계기를 거쳐 근세 유럽에서 만들어졌고, 이후 시간적으로 과거에 공간적으로 바깥으로 투사됐다. 파차카막이 100년 사이에 악마에서 창조자를 거쳐 '페루인의 종교'의 중심 인물이 된 경위, 쐐기문자를 읽기 전에 '바빌로니아인의 종교들'이라는 항목이 먼저 만들어진 경위, 일본이 조약 협상 때문에 슈쿄라는 낱말을 만들어야 했던 경위가 모두 같은 과정의 국면이다.

이 사실이 곧바로 종교 개념의 폐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낱말이 없다고 현상이 없지는 않으며, 범주를 통째로 버리면 비교 연구가 서지 않는다. 여기서 실제로 얻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 종교'나 '메소포타미아 종교' 같은 표현을 쓸 때 그것이 근대의 도구임을 기록해 두는 습관이고, 다른 하나는 정의가 곧 집행이라는 아사드의 지적이다. 메이지 일본에서 무엇을 종교로 셀지 정하는 일이 곧 무엇을 보호하고 무엇을 단속할지 정하는 일이었던 것처럼, 정의는 서술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남는 물음은 이 통찰을 어디까지 밀 것인가다. 범주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고대 자료를 비교할 도구는 필요하고, 그 도구를 다시 만들면 그것 또한 누군가의 시대에 속한 도구가 된다. 종교의 기원을 묻는 논쟁이 자주 제자리를 도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무엇을 세느냐가 정해지지 않은 채로는 기원의 시점도 정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