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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한 테페는 언제 만들어졌는가 — 11,000년이라는 숫자의 출처와 아직 공표되지 않은 것

이 유적에 붙는 연대는 출처마다 다르고, 차이가 1000년을 넘기도 한다. 숫자가 흔들리는 이유는 측정 오차에 있지 않다. 잴 값 자체가 아직 공표되지 않았다. 카라한 테페의 연대는 지금까지 대부분 건물 형태와 석기 형식과 이웃 유적 비교에서 나왔고, 이 유적 자체의 방사성탄소 측정치는 아직 학술지에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

2026년 9월 12일

튀르키예 샨르우르파 동쪽의 카라한 테페를 소개하는 글은 거의 예외 없이 숫자로 시작한다. 그 숫자가 같지 않다. 2026년 8월 25일 튀르키예 문화관광부가 이 유적에서 나온 조각상을 발표하면서 붙인 연대는 약 1만 1000년 전이다. 2026년 4월 발굴단이 식생활 분석 결과를 알리면서 쓴 숫자는 1만 2000년 전이다. 영어권 백과에는 기원전 9750년에 세워져 기원전 9400년에 버려졌다는 표가 실려 있고, 같은 문서의 본문에는 기원전 1만 년에서 9500년 사이라는 다른 서술이 함께 있다. 관광 안내 계열 자료에서는 기원전 9600년부터 8000년까지 1500년 동안 쓰였다는 문장이 자주 보인다.

가장 이른 값과 가장 늦은 값의 차이가 1500년이 넘는다. 이 정도 폭은 유적 하나의 성격을 바꾼다. 기원전 9750년이면 토기 없는 신석기의 이른 단계이고 농경의 어떤 징후보다 앞선다. 기원전 8000년이면 근동 곳곳에서 재배 곡물과 가축이 이미 자리를 잡은 시점이다. 같은 유적에 두 숫자가 동시에 붙어 있다는 것은 숫자 중 일부가 측정에서 나온 값이 아니라는 뜻이다.

연대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고고학에서 연대를 실제 연수로 재는 것을 절대 연대라 하고, 그 표준 수단은 방사성탄소 측정이다. 살아 있는 생물은 대기와 탄소를 주고받으므로 체내 탄소14의 비율이 대기와 같게 유지된다. 죽으면 교환이 멈추고 탄소14가 일정한 속도로 줄어든다. 남은 비율을 재면 죽은 뒤 흐른 시간이 나온다.

BP와 calBC 측정에서 바로 나오는 값은 BP로 표기한다. before present의 약자이고, 기준이 되는 현재는 이 방법이 확립된 1950년이다. 이 값은 달력 연대가 아니다. 대기의 탄소14 농도가 시대마다 달랐기 때문에 나무 나이테 같은 기준 자료로 만든 보정 곡선에 대입해야 달력 연대가 나온다. 보정한 값은 calBC로 쓰고 하나의 숫자가 아닌 구간으로 나온다. 구간에는 신뢰 수준이 따라붙으며 95.4퍼센트가 널리 쓰인다. 보정 곡선 자체도 국제 공동 작업으로 몇 해마다 개정되므로, 같은 측정값이라도 어느 판을 썼느냐에 따라 구간이 달라진다.

측정할 유기물이 없으면 이 방법을 쓸 수 없다. 석회암 기둥에는 탄소14가 없다. 그래서 이 지역 유적에서는 측정 대상을 찾는 일 자체가 연구의 한 부분이 된다.

측정치가 없을 때 쓰는 방법은 상대 연대다. 층위의 위아래 관계, 건물 평면의 형태, 그리고 석기의 형식이 근거가 된다. 토기 없는 신석기를 앞뒤로 나누는 틀을 만든 사람은 영국 고고학자 캐슬린 케니언이고, 근거는 예리코 유적의 층서였다. 케니언은 앞 시기에 둥근 평면의 건물이, 뒷 시기에 네모난 평면의 건물이 나온다는 차이와 물질문화의 차이를 함께 보았다. 두 시기를 각각 PPNA와 PPNB라 부른다.

화살촉 형식이라는 시계 근동 신석기의 상대 연대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지표는 돌화살촉의 형태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 형태가 규칙적으로 바뀌기 때문에, 어떤 형식이 나오는지로 층의 시기를 좁힐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쓰임을 지질학에서 빌려 유도화석이라 부른다.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PPNA의 엘히암·헬완·아스와드 형식과 PPNB의 비블로스·넴리크 형식이 함께 나오고, PPNB의 가장 늦은 단계에 해당하는 형식은 나오지 않는다. 발굴단이 이 유적이 PPNB 중간 단계 이후, 곧 기원전 8000년 무렵에 버려졌다고 보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괴베클리 테페에서 실제로 측정된 것

카라한 테페의 연대 논의를 판단하려면 옆 유적에서 같은 작업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봐야 한다. 괴베클리 테페는 1995년부터 발굴이 이어졌고 연대 측정의 시행착오가 공개돼 있다.

독일고고학연구소의 올리버 디트리히는 2016년 6월 22일 발굴 프로젝트 블로그에 이 유적의 연대 측정 경과를 정리했다. 첫 번째 시도는 고토양 탄산염이었다. 석회암 표면은 흙에 덮이는 순간부터 탄산칼슘 막이 쌓이기 시작하므로, 가장 오래된 막을 골라 재면 그 돌이 묻힌 시점에 가까운 값이 나온다는 착상이다. 결과는 층위의 상하 관계를 맞게 재현했으나 달력 연대가 너무 젊게 나왔다. 3층이 기원전 9000년대로 밀려나고 2층은 기원전 8000년대나 7000년대 값이 나왔다. 디트리히는 이 측정치가 건물과 층의 기준점 구실을 하지 못하며 기껏해야 매몰과 폐기의 하한을 알려 줄 뿐이라고 정리했다.

두 번째 시도가 성과를 냈다. 건물 벽에 바른 진흙 회반죽에는 유기물이 조금 섞여 있다. D 건물 41번과 42번 기둥 사이 벽에서 뽑은 시료를 킬 연구소에서 측정한 값이 9984±42 BP다. 시료 번호는 KIA-44149다.

이 값이 달력 연대로 옮겨질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가 이 글의 주제와 직접 닿는다. 디트리히와 클라우스 슈미트가 2010년 학술지 『Neo-Lithics』 2호 82~83쪽에 이 측정을 처음 보고했을 때 제시한 구간은 기원전 9675년에서 9314년이었고, 사용한 보정 자료는 IntCal09였다. 같은 측정값에 대해 2016년의 정리 글이 제시한 구간은 기원전 9745년에서 9314년이다. 측정은 하나인데 공표된 구간이 다르다. 보정 자료가 개정됐기 때문이다.

숯으로 잰 값도 나왔다. D 건물 외벽에 붙여 판 깊은 시굴에서 기반암 가까이 수습한 숯 세 점의 보정 구간이 기원전 9664년에서 9311년 사이에 모였다. 회반죽 측정치와 잘 맞는다. 디트리히는 이 네 값이 모두 보정 곡선의 평탄한 구간에 걸린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평탄한 구간에서는 측정값이 정밀해도 달력 구간이 넓게 벌어진다.

2016년 시점에 이 유적 전체에서 확보된 방사성탄소 측정치는 11개였다. 디트리히는 이 수로는 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많이 남는다고 적었다. C 건물에는 측정치가 하나뿐이었고, D 건물이 언제 메워졌는지에 대해서는 동물 이빨에서 잰 값과 같은 채움에서 나온 숯의 값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켜 합의가 서지 않았다.

그 뒤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리 클레어가 2020년 학술지 『e-Forschungsberichte des DAI』 2호 81~88쪽에 실은 보고에 따르면, 특별 건물 A·B·C·D의 진흙 모르타르에서 뽑은 유기물로 잰 측정치는 채움에서 잰 값보다 훨씬 균질했고, 이 건물들이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오래 쓰였음을 보여 주었다. 일부 건물은 마지막 건축 단계가 처음 세워진 때보다 500년 이상 뒤였다. 그 결과 둥근 특별 건물과 네모난 건물이 시기적으로 겹친다는 것이 확인됐고, 슈미트가 세운 세 층 편년은 폐기됐다.

채움의 연대는 건물의 연대가 아니다

연대 측정에서 무엇을 재느냐보다 어려운 것은 잰 값이 무엇의 연대인지를 정하는 일이다. 이 지역 유적은 그 판정이 특히 까다롭다. 큰 건물들이 마지막에 흙과 돌로 채워진 상태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채움 안의 유기물은 건물보다 오래됐을 수도 있고 젊을 수도 있다. 다른 곳에 있던 흙을 퍼 왔다면 그 안의 숯은 건물과 관계가 없다. 채움이 빠르게 이루어졌다면 젊은 시료가 아래쪽 깊은 곳에 들어가 층서가 뒤집힌 것처럼 보인다. 디트리히는 괴베클리 테페 3층의 연대 측정이 어려운 이유로 이 문제를 들었다.

2020년 클레어의 보고는 이 문제를 더 밀고 나갔다. 유적 남동쪽 주 발굴 구역의 특별 건물 채움에 대해, 이전에는 사용이 끝난 뒤 의도적으로 메운 결과라고 보았으나 자료를 다시 검토한 결과 언덕의 높은 쪽 둔덕과 사면에서 퇴적물이 흘러 들어온 것으로 해석이 바뀌었다. 이 해석은 채움에 PPNA와 PPNB의 유물이 섞여 있다는 사실과, 그 흙에서 잰 방사성탄소 값들이 균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함께 설명한다.

카라한 테페의 채움은 다르게 판정됐다. 네즈미 카룰이 2021년 학술지 『Türk Arkeoloji ve Etnografya Dergisi』 82호 21~31쪽에 실은 보고는 AB 구조물이 단계를 나누어 의도적으로 채워졌다고 기술한다. 뒷줄의 낮은 기둥 위에만 큰 돌을 얹어 지표까지 높여 놓은 상태가 근거다. 흙이 자연히 흘러들었다면 돌이 기둥 머리마다 올라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카룰은 채움이 건물 경계 바깥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도 함께 들었다.

같은 보고에 채움의 성격을 보여 주는 항목이 하나 더 있다. AB의 바닥 바로 위 붉은 흙에는 고고학적 유물이 들어 있지 않았으나, 그 위 1.5미터 두께의 어두운 채움에는 유물이 섞여 있었고 질그릇 조각도 몇 점 나왔다. 카라한 테페는 토기가 쓰이기 전 시기의 유적이다. 채움에 들어간 흙이 단일하지 않다는 뜻이며, 이런 흙에서 잰 연대를 건물의 연대로 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카라한 테페 자체의 측정치는 어디에 있는가

카룰의 2021년 보고는 서쪽 단구에서 나온 네 구조물의 시기를 PPNA 늦은 단계에서 PPNB 이른 단계 사이로 적었다. 이 판정의 근거로 제시된 것은 세 구조물이 하나의 건물군을 이루며 기반암을 따라 이어진다는 관찰이다. 보고에는 방사성탄소 측정치 표가 없다. 시료 번호도, BP 값도, 보정 구간도 실려 있지 않다.

이 상태는 2026년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즈미르 도쿠즈 에일륄 대학교 고고학과의 에르군 라플리는 2026년 8월 28일 『The Art Newspaper』와의 인터뷰에서 새로 나온 조각상에 대해 연대에 관한 추가 연구가 결정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유로 든 것은 보정한 측정치와 보정하지 않은 측정치가 학술 간행물에 아직 온전히 제시되지 않았고 충분히 논의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발굴이 2019년에 시작돼 일곱 시즌을 지난 유적에 대한 평가다.

비교 대상이 있다. 같은 샨르우르파 대지의 사이부르츠 유적이다. 에일렘 외즈도안이 2024년 학술지 『Documenta Praehistorica』 51권 44~58쪽에 실은 보고는 남쪽 구역 건물들의 바닥 위에서 나온 숯으로 잰 측정치 11개를 제시한다. 값들은 서로 어긋나지 않고 모두 기원전 8500년 무렵을 가리킨다. 이 유적에는 수직 층서가 없어 한 시기만 점유된 것으로 보이며, 측정치가 가리키는 점유 기간은 약 300년이다. 외즈도안은 이 연대가 석기 조합과 건축 특징이 가리키는 PPNB 이른 단계와 맞는다고 정리했다. 첫 3년 조사 결과를 정리한 보고에 이만큼이 들어 있다.

카라한 테페와 사이부르츠의 차이는 유적의 성격에 있지 않다. 공표의 상태가 다르다. 카라한 테페에서 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확인되는 것은 그 값이 학술 간행물에서 검토할 수 있는 형태로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뿐이다. 대중 자료가 인용하는 연대는 그래서 측정에서 오지 않는다. 건물 형태와 석기 형식, 그리고 괴베클리 테페에서 잰 값과의 비교에서 온다.

숫자가 옮겨 다니면서 달라지는 것들

연대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이 유적을 다루는 수치 대부분이 인용을 거치면서 값이 바뀐다.

유적의 넓이가 그렇다. 카룰의 2021년 보고에는 고고학적 퇴적이 약 10헥타르에 걸쳐 있고 채석장까지 더하면 5헥타르가 추가된다고 적혀 있다. 2026년 4월 카룰이 아나돌루 통신에 밝힌 수치는 12헥타르다. 일부 자료에는 14헥타르가 실려 있다. 세 숫자는 무엇을 유적의 범위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 값이고, 대중 자료는 대개 셋 중 하나를 출처 없이 옮긴다.

거리도 그렇다. 카룰의 2021년 보고는 샨르우르파 시내에서 동쪽으로 55킬로미터라고 적었다. 2026년 4월 보도에는 46킬로미터로 나온다.

가장 큰 건물인 AD의 크기도 그렇다. 카룰의 보고에 적힌 값은 지름 23미터다. 이 유적을 소개하는 여러 자료에는 28미터나 30미터가 실려 있고, 처음에 28미터로 지었다가 나중에 30미터로 넓혔다는 서술까지 붙어 있다. 발굴자의 기술에는 그런 확장 단계가 나오지 않는다.

이 지역의 다른 유물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1993년 샨르우르파 발르클르괼 구역의 공사 중에 나온 실물 크기 인물상은 높이가 1.8미터로도 1.9미터로도 소개되고, 재질이 석회암으로도 사암으로도 적히며, 연대는 기원전 9000년으로도 9500년으로도 붙는다. 이 조각을 학술적으로 기술한 문헌은 하랄트 하웁트만이 2003년 이스탄불에서 나온 『Köyden Kente』 기념논총 623~636쪽에 실은 글이다. 대중 자료는 그 글까지 가지 않는다.

서지 정보 자체가 표류하기도 한다. 카룰의 2021년 논문은 『Türk Arkeoloji ve Etnografya Dergisi』 82호 21~31쪽에 실렸다. 발행 기관인 튀르키예 문화관광부 문화재박물관총국의 간행 정보와 학술 데이터베이스 등록 정보가 모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논문을 인용한 다른 논문들에서는 쪽수가 19~31쪽으로도, 18~31쪽으로도 적혀 있고, 호수를 86호로 적은 사례도 있다. 원 논문에 닿지 않고 앞선 인용을 옮기면 이런 값이 그대로 복제된다.

결론 — 확정된 것은 시기의 폭이고, 확정되지 않은 것은 그 안의 위치다

카라한 테페에 붙는 연대의 근거를 갈래로 나누면 셋이다. 건물 평면과 석기 형식이 가리키는 상대 연대, 인접 유적인 괴베클리 테페에서 실제로 측정된 값과의 비교, 그리고 이 유적 자체에서 잰 방사성탄소 값이다. 앞의 둘은 공개돼 있고 셋째는 학술 간행물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대중 자료에 실린 기원전 9750년이나 기원전 9400년 같은 특정 연도는 셋째 갈래에서 나온 값이 아니다.

앞의 두 갈래가 지탱하는 진술은 폭이 넓다. 이 유적은 토기 없는 신석기에 속하고, PPNA의 늦은 단계에서 PPNB의 이른 단계에 걸쳐 쓰였으며, 괴베클리 테페와 같은 시기의 문화권에 있었다. 이 진술은 발굴자의 보고가 직접 지지한다. 여기에 특정 연도를 붙이거나 두 유적 중 어느 쪽이 먼저인지를 정하는 진술은 지지받지 못한다.

괴베클리 테페의 측정 경과가 그 이유를 보여 준다. 처음 시도한 고토양 탄산염은 절대 연대로 쓸 수 없었다. 채움에서 잰 값은 건물의 연대가 아니었고, 채움의 성격에 대한 해석 자체가 2020년에 뒤집혔다. 벽 회반죽에서 잰 값 하나는 보정 자료가 개정되면서 공표된 구간이 달라졌다. 특별 건물의 모르타르를 다시 측정한 결과는 이 건물들이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500년 이상 오래 쓰였음을 보여 주었고, 그 결과 편년 전체가 바뀌었다. 30년 동안 발굴한 유적에서 일어난 일이다.

발굴자 자신은 어느 쪽이 오래됐는지를 쟁점으로 삼지 않는다. 카룰은 2026년 4월 아나돌루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오래됨 자체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어느 정착지가 100년쯤 앞선다고 해서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가 인류사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달라지지는 않으며, 이 유적들은 정착 생활이 시작되던 시기에 세계 어디에도 없던 규모의 건축을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 카룰의 설명이다.

남은 것은 발굴의 진행이다. 카룰이 같은 인터뷰에서 밝힌 수치로는 12헥타르 가운데 6000제곱미터가 발굴됐고, 그 안에도 더 깊은 층이 남아 있다. 새 측정치가 나오면 지금 통용되는 숫자 가운데 일부는 바뀐다. 그때까지 이 유적의 연대를 한 해 단위로 적은 문장은 자료가 아니라 반올림의 이력을 보여 주는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