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에는 사탄도 원죄도 나오지 않는다. 뱀이 사탄과 동일시되고 아담의 범죄가 인류 전체의 조건을 결정하는 사건으로 읽히는 것은 후대의 일이다. 서방 교회가 그 독법을 교리로 확정하는 과정에서 라틴어 번역 한 줄이 작지 않은 몫을 했고, 같은 본문을 읽은 동방 교회는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
창세기 3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도 사탄이라는 낱말은 나오지 않는다. 뱀은 야훼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것이라고 소개되고, 마지막에 배로 기어다니게 되는 저주를 받는다. 원죄라는 말도 없고, 아담의 행위가 이후 모든 사람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서술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이 본문을 읽는 사람 대부분은 사탄의 유혹과 인류의 타락을 읽는다. 본문에 없는 것을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본문 이후에 형성된 독법을 통해 읽는다는 뜻이다. 이 글은 그 독법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따라간다.
확인하기 쉬운 것부터 보면 된다. 아담의 범죄가 이후 인류의 조건을 결정했다는 서술이 히브리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를 찾으면 된다.
나오지 않는다. 아담은 역대상 1장 1절의 족보에 이름만 나오고, 호세아 6장 7절의 용례는 번역이 갈린다. 에덴이라는 지명이 이사야와 에스겔과 요엘에 나오지만 회복이나 파괴를 묘사하는 비교 대상으로 쓰일 뿐이다. 예언서와 시편은 이스라엘의 죄를 끊임없이 다루지만 그 죄의 기원을 아담에게 돌리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전도서와 시편은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창조된 조건으로 다루며, 누구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히브리 성경 안에서 창세기 3장은 여러 기원 설명 가운데 하나로 놓여 있고, 뒤따르는 문헌이 그것을 중심 사건으로 재인용하지 않는다.
변화는 기원전 2세기 이후 유대 문헌에서 시작된다.
그리스어로 쓰인 지혜서 2장 24절은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경위를 악마의 시기로 설명한다. 창세기 본문에는 없는 연결이다. 뱀이라는 짐승과 악한 존재를 잇는 고리가 여기서 만들어진다.
기원후 1세기 말의 유대 묵시 문헌인 에스라4서와 바룩2서는 더 나아간다. 아담의 범죄가 그 자신뿐 아니라 후손 전체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서술이 나오고, 동시에 각 사람이 자기 행위로 심판받는다는 서술도 나란히 나온다. 두 문헌 모두 이 두 진술을 조화시키려 애쓰는 대목을 포함한다. 아담의 행위와 개인의 책임을 어떻게 함께 둘 것인가라는 문제가 이때 이미 제기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뱀과 사탄의 동일시도 같은 시기에 완성된다. 이 과정을 보려면 사탄이라는 낱말 자체의 변화를 먼저 봐야 한다.
동일시가 명문화된 자리는 요한계시록 12장 9절이다. 여기서 큰 용이 옛 뱀이라 불리고, 다시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한다는 설명이 붙는다. 네 이름이 한 문장 안에서 묶인다. 창세기의 뱀, 묵시 문학의 용, 헬레니즘 시기의 마귀, 욥기의 고발자가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된다.
이 통합이 이루어진 뒤에 창세기 3장을 읽으면 본문이 달라진다. 짐승 하나가 사람을 속인 사건이, 우주적 대적자가 신의 창조에 개입한 사건이 된다. 본문의 낱말은 그대로인데 읽히는 규모가 바뀐다.
기독교 쪽에서 결정적인 자리는 바울의 로마서 5장이다. 12절의 그리스어 본문과 라틴어 번역을 나란히 놓으면 문제가 보인다.
καὶ οὕτως εἰς πάντας ἀνθρώπους ὁ θάνατος διῆλθεν, ἐφ᾽ ᾧ πάντες ἥμαρτον
kai houtōs eis pantas anthrōpous ho thanatos diēlthen, eph' hō pantes hēmarton
그리하여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으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로마서 5장 12절 뒷부분. 그리스어 본문은 네스틀레·알란트 계열 교정본. 옮김은 필자.
et ita in omnes homines mors pertransiit in quo omnes peccaverunt
그리하여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건너갔으니,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같은 구절의 라틴어 불가타 본문. 옮김은 필자.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어 두 낱말 에프 호(eph' hō)다. 전치사 에피와 관계대명사가 붙은 형태이며,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 표현으로 읽는 것이 현재 대다수 주석가와 번역의 선택이다. 그렇게 읽으면 뜻은 사람들이 각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두에게 이르렀다는 것이 된다.
라틴어 번역은 이것을 관계사구로 옮겼다. 인 쿠오(in quo), 곧 '그 안에서'다. 선행사를 앞 문장의 한 사람, 곧 아담으로 잡으면 뜻이 달라진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이미 죄를 지었다는 진술이 된다. 개인의 행위 대신 한 사람 안에서의 집단적 범죄를 말하는 문장이 되고, 이는 물려받는 죄책이라는 관념으로 곧장 이어진다.
정확히 말해 둘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로 읽는 것이 문법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그 읽기를 택한 사람이 적고, 현대의 영어 번역은 대부분 이유로 읽는다. 그리고 교리가 이 한 구절에만 의존한다고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51편 5절에서 사람이 죄 가운데 잉태되었다는 진술도 근거로 삼았다.
5세기 초의 논쟁 구도는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브리튼 출신 금욕주의자 펠라기우스는 사람이 선을 택할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고 보았다. 아담의 죄는 나쁜 선례이며 물려받는 무엇이 아니다. 그는 410년 이전에 쓴 로마서 주석에서 이 입장을 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412년에 그 주석을 읽고 저자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로마서 5장 12절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의지가 이미 손상된 상태로 태어나며 은총 없이는 선을 택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같은 해 「죄의 공로와 용서」를 비롯한 저작으로 반박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든 유력한 논거 하나는 교리 문헌이 아닌 교회의 관행에서 나왔다. 당시 교회는 갓난아이에게도 세례를 주고 있었다.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이라면, 아직 아무 행위도 하지 않은 아기에게 세례를 주는 관행은 씻어야 할 무엇이 이미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 실제로 행해지는 일에서 출발해 그것이 성립하려면 무엇이 참이어야 하는지를 따지는 논증이다.
여기서 짚어 둘 것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어에 능숙하지 않았고 라틴어 본문으로 작업했다. 그가 다룬 로마서 5장 12절은 인 쿠오가 들어 있는 본문이다. 그 읽기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진술이 본문 자체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논증의 출발점을 번역이 제공했다.
논쟁은 교회 회의를 통해 정리되었다.
411년 카르타고에서 펠라기우스의 동료 켈레스티우스를 상대로 한 절차가 있었고, 밀라노의 부제 파울리누스가 펠라기우스 측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여섯 항목을 제시했다. 417년에 로마로 소환된 파울리누스는 출석을 거부했고, 418년 교황 조시무스가 반펠라기우스 입장에 대한 지지의 폭을 고려해 켈레스티우스와 펠라기우스를 함께 정죄했다. 같은 해 카르타고 회의가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단죄했다.
한 세기 뒤인 529년 오랑주 회의가 은총이 인간의 결단에 앞선다는 점을 확정하면서 서방 교회의 교리가 자리를 잡았다. 이 회의의 결정은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기의 논쟁에서도 양측이 함께 인용하는 기준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동방 교회가 이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어권 교회는 로마서 5장 12절을 그리스어로 읽었고, 인 쿠오라는 라틴어 번역이 만들어 낸 문제를 만나지 않았다.
두 전통 모두 아담의 불순종이 세계에 무질서와 부패를 들여왔다는 데 동의한다. 갈리는 지점은 물려받는 것의 성격이다. 죄책인가 조건인가. 이 차이는 세례의 의미, 유아의 상태, 인간 의지의 자유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두 결론이 같은 성경 본문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 본문이 하나의 교리를 강제한다면 두 전통이 갈릴 수 없다. 갈렸다는 것은 본문과 교리 사이에 해석의 단계가 있다는 뜻이고, 그 단계에서 번역과 논쟁 상황과 기존 관행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세 단계로 정리된다. 히브리 성경 단계에서 창세기 3장은 중심 사건으로 다뤄지지 않으며, 뱀은 짐승이고 사탄은 신의 궁정에 속한 고발자다. 제2성전기와 신약 단계에서 뱀과 사탄이 하나로 묶이고 아담의 범죄가 인류 전체의 조건과 연결되기 시작한다. 교부 시대 단계에서 서방 교회가 이 연결을 교리로 확정하며, 그 과정에서 로마서 5장 12절의 라틴어 번역이 논증의 출발점을 제공하고 유아 세례라는 기존 관행이 유력한 논거로 쓰인다. 같은 본문을 그리스어로 읽은 동방 교회는 물려받는 것을 죽음의 조건으로 보는 다른 결론에 이른다.
이 정리가 교리의 참과 거짓을 판정하지는 않는다. 어떤 교리가 형성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은 그 교리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의 주요 교리 가운데 형성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고, 삼위일체론도 마찬가지다. 형성사를 아는 것의 쓸모는 다른 데 있다. 어떤 주장이 본문에서 직접 읽히는 것인지, 아니면 본문에 특정 해석을 적용한 결과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남는 문제는 번역의 지위다. 서방 교리의 한 축이 라틴어 번역의 선택 위에 서 있다면, 그 번역이 그리스어 본문의 뜻을 정확히 옮기지 않았다는 현대 주석의 판단은 교리에 무엇을 요구하는가. 한쪽에서는 번역이 부정확해도 교리는 다른 근거들로 유지된다고 보고, 다른 쪽에서는 근거가 하나 빠진 만큼 교리를 다시 진술해야 한다고 본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성경 본문을 어떤 방식으로 읽을 것인가에 대한 앞선 판단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