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둘째 날에 만들어지는 것은 물을 위아래로 가르는 무엇이다. 그것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라키아의 어근은 금속을 두들겨 얇게 펴는 동작을 뜻하고, 칠십인역과 라틴어역은 이를 단단한 것으로 옮겼다. 창조의 '날'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 대부분은 이 층을 지나치고 시작한다.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투는 대목은 엿새라는 기간이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볼 것인가, 긴 지질 시대로 볼 것인가, 아니면 문학적 틀로 볼 것인가. 이 논쟁은 100년 넘게 이어졌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논쟁의 양쪽이 함께 지나치는 대목이 있다. 둘째 날에 만들어지는 물건의 정체다. 이 물건이 무엇인지를 본문과 번역사를 따라 확인하면, 엿새 논쟁이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지가 드러난다.
창세기 1장 6절부터 8절까지의 구조는 이렇다. 물 한가운데 무언가가 생겨 물과 물을 가른다. 그 위에 있는 물과 그 아래에 있는 물이 나뉜다. 그 무언가에 하늘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셋째 날에는 아래 물이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난다.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이 그 무언가에 놓인다. 다섯째 날에는 새가 그 무언가의 앞을 난다.
여기서 위에 있는 물이 문제가 된다. 본문은 그 물이 어디로 갔다고 말하지 않는다. 계속 위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홍수 이야기에서 다시 나온다. 창세기 7장 11절은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고 적고, 8장 2절은 그 샘과 창이 닫혔다고 적는다. 위의 물이 저장되어 있다가 창이 열리면 쏟아지는 구조다.
그 무언가를 가리키는 히브리어가 라키아(raqia)다. 히브리 성경 전체에서 17번 나온다.
이 명사의 어근인 동사 라카(raqa)는 두들겨 펴다, 밟아 넓히다를 뜻한다. 용례를 보면 뜻이 분명해진다. 출애굽기 39장 3절은 금을 두들겨 얇은 판으로 만드는 작업에 이 동사를 쓴다. 민수기 16장 38절은 제단을 덮을 판을 두들겨 만드는 작업에 쓴다. 예레미야 10장 9절은 은을 입힌 것을 가리킬 때 쓴다. 이사야 42장 5절은 신이 땅을 펴는 행위에 쓴다.
히브리어와 가까운 페니키아어에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명사가 있는데, 금속으로 만든 접시나 대접을 가리킨다.
고대의 번역자들이 이 낱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번역자들은 라키아를 스테레오마(stereoma)로 옮겼다. 단단함, 굳은 것을 뜻하는 낱말이다. 아퀼라와 심마쿠스의 후대 그리스어 번역도 같은 낱말을 썼다.
기원후 4세기 말 히에로니무스는 라틴어로 옮기면서 피르마멘툼(firmamentum)을 골랐다. 굳게 하다를 뜻하는 피르마레에서 나온 말이며, 단단한 받침이나 버팀대를 가리킨다. 영어 firmament와 한국어 성경의 궁창이 모두 이 계보에서 나왔다.
번역은 해석이다. 기원전 3세기의 유대인 번역자와 4세기의 라틴 교부가 이 낱말에서 단단함을 읽었다는 사실은, 그 시기까지 이 본문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알려 준다.
창세기 바깥의 용례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욥기 37장 18절에서 엘리후는 신이 하늘을 펴는 일을 두고, 부어 만든 거울처럼 단단하다고 말한다. 여기 쓰인 동사가 라카다. 고대 이집트에서 기원전 3천년기부터 청동을 갈아 만든 거울이 쓰였고, 출애굽기 38장 8절은 이스라엘 여자들이 그 거울을 바쳤다고 적는다. 비유의 대상이 실제로 쓰이던 물건이다.
에스겔 1장 22절은 환상 속 생물들의 머리 위에 놀라운 수정 같은 라키아가 펼쳐져 있다고 적는다. 출애굽기 24장 10절은 신의 발 아래 사파이어를 깐 것 같은 것이 있고 하늘처럼 맑았다고 적는다.
땅 쪽도 같은 구조다. 사무엘상 2장 8절은 땅의 기둥들을 말하고, 욥기 9장 6절은 땅이 기둥 위에 서 있다고 말한다. 출애굽기 20장 4절의 십계명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위로 하늘에 있는 것, 아래로 땅에 있는 것,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을 나열한다. 세 층이다.
라키아를 단단한 덮개로 읽는 데 반대하는 논거도 있고, 그 논거는 검토할 가치가 있다.
첫째, 앞에서 본 대로 어원이 용법을 결정하지 않는다. 라카가 두들겨 편다는 뜻이라면 라키아는 펼쳐진 것, 곧 넓게 퍼진 공간을 가리킬 수도 있다. 현대 영어 번역 여럿이 expanse로 옮기고 한국어 번역 일부가 창공으로 옮기는 근거가 여기 있다.
둘째, 창세기 1장 20절은 새가 라키아 앞을 난다고 적는다. 라키아가 단단한 판이라면 새가 그 안을 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셋째, 욥기 37장 18절은 하늘이 거울이라고 말하지 않고 거울처럼 단단하다고 말한다. 비유이므로 문자 그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는 논거다.
이 논거들에는 각각 한계가 있다. 새가 나는 자리는 히브리어로 라키아의 표면 앞쪽을 가리키는 표현이며, 덮개 아래 공간을 뜻하는 것으로 읽어도 문장이 성립한다. 비유라는 지적은 맞지만, 비유는 비유의 대상이 되는 통념을 전제한다. 하늘을 부어 만든 거울에 견주려면 듣는 사람이 하늘을 그런 종류의 물건으로 상상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위에 있는 물이라는 요소가 남는다. 라키아가 넓게 퍼진 공간이라면 그 위에 저장된 물이 무엇인지, 하늘의 창이 무엇인지를 따로 설명해야 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라키아의 성격을 두고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 창세기 1장이 전제하는 우주가 현대 천문학의 우주와 다르다는 점은 라키아 하나에만 걸려 있지 않다. 위의 물, 하늘의 창, 땅의 기둥, 땅 아래의 물이 함께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이 그림은 이스라엘만의 것이 아니다. 바빌로니아의 창조 서사시 「에누마 엘리시」에서 마르두크는 바다의 여신 티아마트를 둘로 가르고 그 절반으로 하늘을 만든 뒤, 물이 새지 않도록 빗장과 파수꾼을 둔다. 위의 물을 무언가가 막고 있다는 구도가 여기에도 있다.
앞선 글들에서 본 것과 같은 양상이다. 창세기는 주변 문화가 공유하던 세계상을 재료로 쓰고, 그 재료 위에서 다른 주장을 편다. 에누마 엘리시에서 하늘은 신들의 전쟁에서 나온 전리품이지만 창세기에서는 말 한마디로 생겨나고, 해와 달은 신격을 잃고 시간을 알리는 등불로 내려앉는다. 바꾼 것이 무엇인지를 보려면 바꾸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 관찰이 근대 천문학 이후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1554년에 창세기 주석을 낸 장 칼뱅은 코페르니쿠스 이후의 문제 상황 앞에서 하나의 원칙을 제시했다. 모세는 천문학을 가르치려고 쓴 것이 아니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썼다는 원칙이다. 그는 천문학과 다른 심오한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은 다른 데로 가라고 적었고, 신학자로서 모세는 별보다 사람을 배려해야 했다고 적었다.
칼뱅이 세운 것이 적응 원리다. 신의 계시가 받는 사람의 이해 수준에 맞춰 주어진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을 받아들이면 창세기 1장이 청동기 근동의 우주 구조를 전제한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구조가 그 시대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던 방식이었고, 본문은 그 방식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동시에 이 원칙은 대가를 요구한다. 본문의 우주 구조가 그 시대의 것이라면, 본문에서 우주에 관한 정보를 끌어내려는 작업도 함께 포기해야 한다. 적응 원리는 한 방향으로만 적용될 수 없다.
세 층으로 정리된다. 본문 층위에서 창세기 1장은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가르는 라키아를 설정하고, 그 위의 물을 저장된 상태로 남겨 두었다가 홍수 때 하늘의 창으로 쏟아 낸다. 땅은 기둥 위에 서 있고 그 아래에 다시 물이 있다. 낱말 층위에서 라키아의 어근은 금속을 두들겨 펴는 동작을 가리키고, 기원전 3세기의 그리스어 번역자와 4세기의 라틴어 번역자가 모두 단단함을 뜻하는 낱말을 골랐으며, 욥기와 에스겔의 용례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넓게 퍼진 공간으로 읽는 반론이 있지만, 위의 물과 하늘의 창이라는 요소를 따로 설명해야 하는 부담이 남는다. 비교 층위에서 이 구조는 고대 근동이 공유하던 세계상이고 이스라엘 고유의 것이 아니며, 창세기는 그 구조를 유지한 채 신격의 배치와 창조의 방식을 바꾼다.
이 정리가 엿새 논쟁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하다. 하루를 24시간으로 읽든 지질 시대로 읽든, 그 하루 동안 만들어진 것은 단단한 덮개와 그 위의 물이다. 본문의 우주가 현대의 우주가 아닌데 시간 단위만 현대의 것으로 환산하는 작업은 한 요소를 고르고 나머지를 버리는 일이 된다. 선택의 기준을 대야 하는데, 그 기준은 본문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남는 물음은 적응 원리의 적용 범위다. 칼뱅이 천문학에 대해 세운 원칙을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 우주 구조에만 적용할 것인가, 생명의 기원과 인류의 출현에도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 서술 전체에 적용할 것인가. 확장할수록 본문이 주장하는 바가 줄어들고, 제한할수록 기준을 따로 대야 한다. 이 물음은 자료로 판정되지 않는다. 앞선 글들에서 반복해 확인한 것과 같은 자리다. 고고학과 문헌학과 유전학은 각자 잴 수 있는 것을 재고,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성경을 어떤 종류의 글로 읽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