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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는 왜 신앙을 감정에 두었는가 — 계몽주의의 압박과 "왜 하필 기독교인가"라는 미해결 문제

신학의 출발점을 인간의 내면으로 옮기면 계몽주의의 공격은 피할 수 있다. 그 자리에서 기독교가 왜 다른 종교보다 참인지를 말할 언어는 남지 않는다.

2026년 9월 12일

1799년 베를린, 종교를 낮잡아 보던 사람들에게 쓴 책

1799년 베를린의 출판업자 요한 프리드리히 웅거가 익명의 책 한 권을 냈다. 제목은 『종교에 대하여.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들에게 보내는 강연』(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tern)이었다. 다섯 편의 강연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청중 앞에서 행해진 적은 없는 글이다. 저자는 서른한 살의 개혁교회 목사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1768~1834)였고, 당시 베를린 자선병원의 원목으로 일하고 있었다.

제목의 수신자가 이 책의 성격을 결정한다. 여기서 '교양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다. 당시 베를린에는 문인과 학자가 모이는 살롱이 여럿 있었고, 슐라이어마허는 유대인 의사 마르쿠스 헤르츠의 부인 헨리에테 헤르츠가 주관하던 모임의 일원이었다. 낭만주의 문학운동을 이끌던 프리드리히 슐레겔과는 한때 같은 집에 살았다. 이 사람들은 종교에 반대하지 않았다. 종교를 지적으로 낮은 것, 교리와 도덕규칙의 껍데기, 시대에 뒤처진 유물로 보았을 뿐이다. 흥미를 잃은 상대는 논박으로 되돌릴 수 없다.

슐라이어마허가 책에서 내세운 주장은 종교가 실용적 효용도 아니고, 윤리적 지침도 아니며, 특정 의례나 이론적 통찰도 아니고, 미적 감흥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종교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꿔 말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는 주장이다. 책은 빠르게 알려졌고 저자의 이름도 곧 드러났다. 이후 1806년과 1821년에 두 차례 크게 손질한 판본이 나왔는데, 19세기에는 주로 3판이 읽혔고 오늘날에는 거의 1판만 읽힌다. 세 판본의 차이가 커서 비교 판본이 따로 간행될 정도다.

이 글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하나다.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의 근거를 인간 내면의 감정으로 옮겨 계몽주의의 공격에서 종교를 빼냈지만, 그 자리에서는 기독교가 왜 다른 종교보다 참인지를 말할 근거가 자기 원리 안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 결함은 한 세대 뒤 에른스트 트뢸치의 손에서 기독교 절대성의 포기로 귀결되었다.

칸트 이후 신학이 몰린 두 방향

왜 이런 책이 필요했는지 이해하려면 18세기 후반 개신교 신학이 처한 상태를 보아야 한다. 압박은 두 방향에서 왔다.

첫째는 인식론이었다. 이마누엘 칸트는 1781년 『순수이성비판』에서 신의 존재를 이론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이라는 전통적 신 존재 증명은 모두 인간 이성이 경험의 한계 밖으로 나간 사례이며 성립하지 않는다고 그는 판정했다. 신학이 수백 년 동안 의지해 온 논증 체계가 한 권의 책으로 무너진 상황이었다.

둘째는 역사 비평이었다. 함부르크의 동양어 교수 헤르만 자무엘 라이마루스가 남긴 유고를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이 1774년부터 익명으로 공개하면서, 복음서 기록의 신빙성이 공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레싱이 이 논쟁에서 제기한 문제는 지금도 인용된다. 역사적 진리는 우연한 사실이고 이성의 진리는 필연적인 것인데, 우연한 역사 기록이 어떻게 영원한 진리의 증명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예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보고는 2천 년 전 몇 사람의 증언이며 신앙의 필연적 근거가 되기에는 성격이 다르다는 지적이다.

칸트가 내놓은 대안은 종교를 도덕의 자리로 옮기는 것이었다. 1793년 『순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가 그 결과물이다. 신의 존재와 영혼 불멸은 이론적으로 증명되지 않지만 도덕 실천의 요청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기독교의 가치는 도덕적 심성을 기르는 데 있다고 그는 보았다. 이 노선을 받아들이면 신학부는 대학에 남을 수 있다. 대신 기도, 예배, 은혜, 죄 사함처럼 도덕으로 환원되지 않는 요소들이 부수적인 자리로 밀려난다. 슐라이어마허는 이것을 항복으로 보았다.

종교는 형이상학도 도덕도 아니다 — 제3의 영역이라는 해법

슐라이어마허의 전략은 종교를 이론 이성의 영역에서도 실천 이성의 영역에서도 빼내어 제3의 자리에 놓는 것이었다. 1799년의 책에서 그는 그 자리를 직관과 감정이라고 불렀고, 종교란 무한자에 대한 감각이자 취향이라고 규정했다. 무엇을 아는 일도 아니고 무엇을 행하는 일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 규정은 1821~22년에 출간되고 1830~31년에 개정된 주저 『기독교 신앙』(Der christliche Glaube)에서 더 정밀해진다. 『신앙론』(Glaubenslehre)이라 줄여 부르는 이 책은 프로이센 개혁교회의 교의학, 곧 교회가 고백하는 내용을 조직적으로 서술한 조직신학 저작이다. 그 제4절에서 경건의 본질이 규정된다.

Das Gemeinsame aller noch so verschiedenen Äußerungen der Frömmigkeit, wodurch diese sich zugleich von allen andern Gefühlen unterscheiden, also das sich selbst gleiche Wesen der Frömmigkeit, ist dieses, daß wir uns unserer selbst als schlechthin abhängig, oder, was dasselbe sagen will, als in Beziehung mit Gott bewußt sind.

경건의 표현이 아무리 여러 갈래여도 그 모두에 공통되며, 그럼으로써 경건을 다른 모든 감정과 구별해 주는 것, 곧 언제나 자기와 같은 경건의 본질은 이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로, 달리 말하면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존재로 의식한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 『기독교 신앙』 제4절. 비평 전집판 KGA I/13,1, 32쪽. 한국어는 직접 옮김.

옮기면서 판단이 필요했던 낱말은 schlechthin이다. '전적으로', '단적으로', '무조건적으로'로 모두 옮길 수 있는데, 여기서는 조건이 붙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전적으로'를 택했다. 한국 신학계에서는 이 개념을 대개 '절대의존감정'으로 옮긴다.

절대의존감정 사람은 살면서 부모, 사회, 자연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또 부분적으로 자유롭다. 이런 상대적 의존과 상대적 자유의 경험 아래에, 자기 존재 자체를 자기가 만들지 않았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의식을 절대의존감정이라 부르고, 이것이 곧 하나님 의식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감정'은 기분이나 정서를 뜻하지 않고, 사고와 행위에 앞서 있는 직접적 자기의식을 가리킨다. 그가 하나님이라는 말로 가리킨 것도 우선은 이 감정이 되돌아가 닿는 그 무엇이다.

이 배치가 두 공격을 동시에 무력화한다. 칸트의 인식론 비판은 종교를 건드리지 못한다. 종교는 애초에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 인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 비평도 신앙의 근거를 흔들지 못한다. 신앙의 근거를 신자의 의식에 두었기 때문이다. 같은 책 제30절에서 그는 교의신학이 경건한 의식의 상태를 서술하는 학문이며 그 자료는 내적 경험의 영역에서만 가져올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하나님 자체에 대한 진술은 종교적 의식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대가가 여기서 발생한다. 교리는 신앙 의식을 언어로 옮긴 결과물이 된다. 하나님에 관한 객관적 정보라는 지위를 잃는다. 삼위일체, 창조, 예정 같은 진술의 지위가 달라진다. 그것들은 신자의 의식 상태를 분석해 얻은 서술로 바뀐다.

헤른후트에서 온 것 — 방어 전략만은 아니었다

이 구상을 상황 대응으로만 읽으면 절반을 놓친다. 세 가지가 함께 작용했다.

첫째는 성장 배경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아버지는 개혁교회 군목이었고, 1783년 부모는 그를 슐레지엔의 그나덴프라이에 있는 모라비아 형제단 공동체로 보냈다. 형제단은 18세기 초 친첸도르프 백작의 영지 헤른후트에 정착한 보헤미아계 개신교 집단으로, 교리 체계보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와 내면의 회심 경험을 중시했다. 슐라이어마허는 니스키의 형제단 학교를 거쳐 1785년 바르비의 신학교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몇몇 친구와 함께 공동체의 폐쇄성에 회의를 품고 1787년 떠났다. 그러나 단절이 끝이 아니었다. 1802년 그나덴프라이에 남아 있던 누이 샤를로테를 찾아간 뒤 그는 누이에게, 모든 일을 겪고 나서 자신이 다시 헤른후트 사람이 되었으며 다만 더 높은 차원에서 그렇다고 적었다.

Ich kann sagen, daß ich nach allem wieder ein Herrnhuter geworden bin, nur von einer höheren Ordnung.

모든 일을 겪고 나서 나는 다시 헤른후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더 높은 차원의 헤른후트 사람이다.

슐라이어마허가 누이 샤를로테에게 보낸 1802년 편지. 한국어는 직접 옮김.

신앙의 자리를 내면 경험에 두는 발상은 그가 실제로 신앙을 겪은 방식에서 왔다.

둘째는 낭만주의와의 결합이다.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에 맞서 직관과 감정과 무한자에 대한 감각을 앞세우는 사조 안에서 그는 작업했다. 종교를 감정에 둔 것은 당대의 최신 사상과 결합해 종교의 지위를 끌어올리려는 시도였다. 종교를 예술과 나란한, 혹은 그보다 근원적인 인간 활동으로 제시한 것이다.

셋째는 제도적 위치다. 슐라이어마허는 1810년 개교한 베를린 대학의 창립 교수였고 183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 신학 교수로 있었다. 새로 세워지는 근대 대학 안에서 신학부가 왜 남아야 하는지를 변론해야 하는 자리였다. 1811년의 『신학 연구 개요』에서 그는 신학을 교회 지도자 양성에 쓰이는 실천적 학문으로 규정했다. 신학의 학문적 정당성을 그 기능에서 찾은 셈이다. 같은 시기 그는 프로이센에서 루터파와 개혁파를 한 교회로 합치는 연합 작업에도 관여했고, 교회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왜 하필 기독교인가 — 발전 단계와 목적론적 유형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절대의존감정이 인간 일반에게 있는 것이라면, 그 감정이 발현된 형태 가운데 기독교가 왜 특별한가. 불교도, 조로아스터교도, 토테미즘도 같은 감정의 발현이 아닌가. 슐라이어마허 자신이 이 물음을 알고 있었고, 『기독교 신앙』의 서론이 상당 부분을 여기에 쓴다.

그의 답은 발전 단계론이다. 제8절에서 그는 경건의 형태를 세 단계로 나눈다. 물신숭배와 토테미즘, 다신교, 일신교의 순서이며 일신교가 가장 높은 단계다. 기준은 의존의 대상이 하나로 모이는가다. 낮은 단계에서는 절대의존감정이 자연 사물이나 개별 신들에게 흩어져 잘못 붙는다. 유한하고 개별적인 대상은 무한자를 향한 의식을 담아낼 수 없으므로, 그런 대상을 섬기는 일은 결국 자기를 섬기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신교 안에서는 다시 셋을 비교한다. 유대교는 일신교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특정 혈통에 묶어 특수화했고, 종교의식을 유한한 것에 결박하는 물신숭배 쪽으로 기우는 성향을 보인다고 보았다. 이슬람은 숙명론 쪽으로 기운다고 보았다. 기독교가 가장 순수한 형태라는 결론이다.

또 하나의 분류 기준이 있다. 경건의 방향을 심미적 유형과 목적론적 유형으로 나누는 구분인데, 전자는 주어진 운명을 관조하는 쪽이고 후자는 도덕적 과제를 향해 활동하는 쪽이다. 기독교는 목적론적 유형에 속하며, 그 안에서도 고유한 특징이 있다고 그는 규정한다.

eine eigenthümliche Gestaltung der Frömmigkeit in ihrer teleologischen Richtung […] daß alles einzelne in ihr bezogen wird auf das Bewußtsein der Erlösung durch die Person Jesu von Nazareth.

목적론적 방향을 지닌 경건의 고유한 형태이며 […] 그 안의 모든 개별적인 것이 나사렛 예수라는 인격을 통한 구속의 의식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구별된다.

슐라이어마허, 『기독교 신앙』 제11절. 한국어는 직접 옮김.
목적론적 유형과 심미적 유형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를 분류할 때 쓴 두 번째 기준이다. 심미적 유형은 세계에 주어진 질서와 운명을 받아들이고 관조하는 쪽이고, 목적론적 유형은 세계 안에서 이루어야 할 도덕적 과제를 향해 움직이는 쪽이다. 그는 기독교를 목적론적 유형으로 분류했다. 이 기준은 칸트 이후 독일 관념론의 도덕 중심 가치관에서 왔고, 절대의존감정이라는 자기 원리에서 도출되지 않는다. 나중에 문제가 되는 지점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이 도식에서 낮은 자리를 받는다.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한 세력 앙그라 마이뉴가 맞서는 이원론 구조이므로 의존의 대상이 하나로 모이지 않고, 따라서 순수한 일신교에 이르지 못한다는 판정이다.

이 답이 성립하지 않는 세 가지 이유

이 체계는 안에서 무너진다.

첫째, 판정 기준이 자기 원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절대의존감정이라는 출발점 자체는 왜 일신교가 다신교보다 높은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하나에 의존하는 것이 여럿에 의존하는 것보다 순수하다는 전제는 이미 유대·기독교 전통 안에서 형성된 판단이다. 결론을 전제에 넣고 논증을 시작한 것이다. 목적론적 우위라는 기준도 마찬가지로 칸트 이후의 도덕 중심 가치관에서 빌려 왔지 경건의 분석에서 도출되지 않았다. 종교의 본질을 규정하는 원리와, 종교들을 서열화하는 기준이 서로 다른 출처에서 온 것이다.

둘째, 불교는 이 틀에 구조적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절대의존감정은 의존할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이미 전제한다. 그런데 불교는 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생겨난다는 연기(緣起)와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말하며, 의존의 대상이 될 절대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둘 중 하나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거나, 절대의존감정이 종교의 보편 본질이라는 규정이 틀렸거나. 슐라이어마허의 도식 안에서 불교는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채 남는다.

셋째, 차이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기독교가 절대의존감정이 가장 왜곡 없이 나타난 형태라면 그것은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순도의 차이다. 그러면 더 순수한 형태가 나중에 나타날 가능성을 원리적으로 막을 수 없다. 남는 것은 지금까지의 우월성뿐이다. 게다가 그 우월성의 판정 기준마저 외부에서 빌려 온 것이므로, 기준이 바뀌면 순위도 바뀐다.

오토가 기준을 바꾼 이유 — 절대의존감정에서 피조물 감정으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시 다룬 사람이 루돌프 오토(1869~1937)다. 그는 1917년 『성스러움. 신적인 것의 관념에 있는 비합리적인 것과 그것이 합리적인 것에 대해 갖는 관계』(Das Heilige)를 냈다. 20세기 독일 신학 서적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축에 드는 책으로, 지금까지 스무 개 남짓 언어로 번역되었다.

오토는 슐라이어마허를 계승하되 핵심 개념을 바꾼다. 그는 종교 경험의 고유한 내용을 가리키려고 라틴어 numen(신, 신적 힘)에서 누미노제(das Numinöse)라는 말을 새로 만들었다. 그것은 비합리적이고 비감각적인 경험이며, 그 대상이 자기 밖에 있고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 경험을 두렵고도 매혹적인 신비, 라틴어로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고 규정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느끼는 전율과, 동시에 거부할 수 없이 끌리는 매혹이 한 경험 안에 있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의존감정에 해당하는 자리에 오토가 놓은 것은 피조물 감정(Kreaturgefühl)이다. 오토가 본 슐라이어마허의 문제는, 의존감정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분석해 얻은 것이어서 자기 안에 머문다는 점이었다. 오토가 강조한 것은 밖에서 압도해 오는 힘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는 경험이다. 인간 안에 있는 소질에서 출발하는 대신 밖에서 오는 것과의 마주침에서 출발한 셈이다.

기준을 이렇게 바꾸면 종교의 범위가 넓어진다.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는 종교 전통도 성스러움의 경험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오토는 실제로 인도에 두 차례 다녀왔고 여러 종교 전통을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서로 다른 통로로 다루었다. 종교 현상 자체를 기술하는 학문, 곧 종교현상학이 여기서 출발한다. 다만 오토 자신은 신학자였음에도 개신교 신학에 준 영향이 크지 않았는데, 종교를 인간 경험 위에 세우려는 시도 자체가 당시 부상하던 변증법적 신학의 전제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토가 종교학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 자체가, 슐라이어마허가 설계한 틀이 신학보다 종교 연구에 더 잘 맞았다는 증거다.

트뢸치가 도달한 자리 — 절대성의 포기

슐라이어마허가 붙들려 한 기독교의 우위는 한 세대 만에 무너진다. 에른스트 트뢸치(1865~1923)는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에서 가르친 신학자이자 역사철학자이며,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동료이자 이웃이었다. 그는 1902년 『기독교의 절대성과 종교사』(Die Absolutheit des Christentums und die Religionsgeschichte)에서 기독교의 절대성 주장을 정면으로 검토했다.

역사주의 모든 사상, 제도, 종교가 특정한 시대와 문화의 산물이며 그 바깥의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다. 19세기 독일 역사학이 발전시킨 방법론적 태도인데, 이를 종교에 일관되게 적용하면 어떤 종교도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절대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트뢸치가 평생 씨름한 문제가 이것이다. 상대적인 것 안에서 절대적인 것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트뢸치는 기독교를 역사의 조건 안에서 형성된 현상으로 판정했다. 그럼에도 그는 기독교가 '우리에게는' 최고의 종교적 진리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이것을 상대적 절대성이라고 부른다. 기독교가 절대적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보편성 안에서 인간의 지식 전체를 자기 이해 속으로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이라는 논법이다. 종교를 역사 안의 현상으로 다루는 방법을 일관되게 적용한 결과, 절대성이라는 말의 내용이 바뀐 것이다.

후기에 가면 더 물러선다. 그는 1923년 옥스퍼드에서 「세계 종교들 가운데 기독교의 자리」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같은 해 2월 1일 심장 질환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원고는 사후에 출간되었다. 거기서 기독교는 유럽 문화권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게 타당한 종교라는 정도로 서술된다. 트뢸치는 기독교를 종교를 향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충동이 나타난 한 사례로 보았고, 이 태도 때문에 교회 쪽과 멀어졌다. 1915년 베를린 대학으로 옮길 때 처음에는 신학부 교수직이 거론되었으나 신학부 구성원들이 반대해 철학부로 갔다.

트뢸치를 슐라이어마허의 배신자로 볼 이유는 없다. 그는 슐라이어마허가 설계한 방법을 더 철저하게 적용했을 뿐이다. 종교의 본질을 인간의 종교 의식에서 찾고, 각 종교를 그 의식이 역사 속에서 나타난 형태로 다루고, 기준을 그 형태들 사이에서 비교한다. 이 절차를 끝까지 밀면 비교의 자리에 선 관찰자가 어느 문화권에 속해 있느냐가 답을 결정하게 된다. 슐라이어마허는 그 결과를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판정 기준을 외부에서 빌려 왔다. 트뢸치는 빌려 온 기준의 자격을 물었다.

결론 — 종교를 공격 사정권 밖으로 옮긴 대가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말할 언어였다

슐라이어마허가 한 일은 신학의 출발점을 옮긴 것이다. 신 존재 증명이 무너지고 복음서의 역사성이 논쟁에 붙은 상황에서, 그는 신앙의 근거를 논증과 기록에서 빼내어 인간의 직접적 자기의식에 놓았다. 이 배치는 칸트의 인식론 비판과 라이마루스 이후의 역사 비평을 동시에 비켜 간다. 종교가 고유한 영역을 가진다는 그의 주장은 종교를 도덕이나 형이상학으로 환원하려던 시도에 맞선 성과였고, 오토와 그 뒤를 이은 종교현상학이 여기서 출발했다.

같은 배치가 대가를 청구한다. 신학이 다룰 수 있는 것이 종교 의식으로 한정되면, 기독교의 진리 주장은 의식의 순도 비교로 바뀐다. 순도 비교에는 기준이 필요한데, 그 기준은 절대의존감정이라는 원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슐라이어마허는 일신교가 다신교보다 순수하다는 전제와 도덕적 목적론이 관조보다 높다는 전제를 밖에서 가져왔고, 두 전제 모두 그가 방어하려던 전통 안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불교처럼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는 전통은 그의 도식 안에 자리를 배정받지 못했다. 그리고 순도의 차이는 원리적으로 잠정적이므로, 기독교에 남는 것은 현재까지의 우위였다. 트뢸치가 확인한 것이 이 잠정성이다.

남는 물음은 신학이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가다. 슐라이어마허의 답을 거부한다고 해서 신 존재 증명이 복원되지도 않고 역사 비평이 철회되지도 않는다. 20세기 신학은 이 자리에서 두 방향으로 나뉜다. 한쪽은 인간 실존이라는 출발점을 유지하되 그 실존을 밖에서 오는 선포 앞의 결단으로 다시 규정하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출발점 자체를 인간에게서 계시로 되돌리는 길이다. 두 길 모두 슐라이어마허를 거부한다고 선언하면서 출발했고, 두 길 모두 자기가 정말로 그를 벗어났는지를 상대에게서 의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