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어와 알파벳 · 2
2026년 9월 12일
대영박물관에는 손으로 들 수 있는 크기의 붉은 사암 스핑크스가 하나 있다. 이집트 미술로서는 볼품없는 물건이고 왕을 기념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조각에 새겨진 여섯 글자가 오늘날 라틴 문자·키릴 문자·아랍 문자·인도 문자를 쓰는 수십억 명과 연결된다. 여섯 글자가 읽힌 1916년 이전까지 알파벳의 출발점은 미해결 문제였다. 이 글은 그 여섯 글자가 읽히기까지의 과정과, 읽힌 뒤에도 여전히 확정되지 않은 것들을 다룬다.
시나이 반도 서남부의 세라비트 엘카딤은 고대 이집트가 터키석을 캐던 광산 지대다. 사막 고원 위에 광갱이 흩어져 있고, 그 한가운데에 하토르 여신을 모신 신전이 있었다. 하토르는 여러 성격을 겸한 여신인데, 여기서는 광물과 터키석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셔졌다.
이집트는 이 광산에 정기적으로 원정대를 보냈다. 중왕국 제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와 아메넴하트 3세·4세 치세에 특히 집중적으로 파견되었다. 원정대에는 이집트인 관리와 서기뿐 아니라 이집트인이 아시아인이라 부르던 서셈어 화자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채굴은 고된 일이었고 인력은 레반트에서 끌어왔다.
이 사람들이 신전 주변과 광갱 벽에 무언가를 새겼다. 이집트 상형문자로 쓴 정식 명문과 나란히, 이집트 그림 기호를 닮았으나 이집트어로는 읽히지 않는 기호 수십 점이 남았다.
영국 이집트학자 윌리엄 플린더스 페트리가 20세기 초 이 지역을 조사했다. 발굴 결과는 1906년 『시나이 조사』(Researches in Sinai)로 출판되었다. 수습된 유물 가운데 하토르 신전 터에서 나온 소형 사암 스핑크스가 있었다. 현재 대영박물관 소장품 번호 EA41748이고, 학계에서는 시나이 345로 부른다. 이 번호는 앨런 가디너가 시나이 출토 명문에 일련번호를 매기면서 1번부터 344번까지를 일반 이집트 명문에 배정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새 문자군을 345번부터 시작한 데서 나왔다.
페트리는 이 기호들이 알파벳일 가능성을 짐작했다. 다만 읽어내지는 못했다. 기호가 이집트 상형문자와 닮았는데도 이집트어 음가로는 아무 뜻이 나오지 않았고, 알려진 어떤 문자 체계와도 대응하지 않았다.
당시 학계가 답을 찾고 있던 문제는 더 컸다. 유럽 문자들이 그리스 문자에서 갈라져 나온 경로는 일찍 추적되었고, 셈어 쪽에서 페니키아 문자와 사바 문자가 각각 퍼져 나간 경로도 그랬다. 문제는 그 셋의 공통 조상이었다. 페니키아 문자의 출처를 설명한 연구는 없었다.
가디너는 1916년 학술지 Journal of Egyptian Archaeology 3권 1~16쪽에 「셈 알파벳의 이집트 기원」을 실었다. 같은 호 17~21쪽에 아서 카울리의 「셈 알파벳의 기원」이 이어 실렸으니, 이 문제가 당시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 수 있다.
가디너가 쓴 열쇠가 스핑크스였다. 이 조각에는 두 종류의 글이 함께 새겨져 있다. 하나는 이집트 상형문자로 쓴 짧은 헌사이고, 다른 하나는 정체불명 문자로 쓴 여섯 글자다.
가디너는 정체불명 쪽 기호를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빌려온 그림으로 보되, 그 그림의 이집트어 음가를 버리고 그림이 가리키는 셈어 낱말의 첫 자음만 음가로 읽는 방법을 적용했다. 이 방법을 두음법이라 한다.
이 방법으로 여섯 글자를 읽자 bʿlt가 나왔다. 셈어로 여주인, 곧 바알라트다. 이집트 쪽 헌사는 터키석의 여주인 하토르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이었다. 셈어 화자들이 하토르를 자기네 말로 바알라트라 불렀다면, 두 글은 같은 대상에게 같은 취지로 바친 헌사가 된다.
b-ʿ-l-t
여주인(바알라트)에게
대영박물관 EA41748(시나이 345)의 원시시나이 문자 명문. 가디너가 1916년 제시한 판독이며, 후대 연구는 앞에 두 글자를 더 읽어 m-ʾ-h-b-ʿ-l-t로 보기도 한다. 원시시나이 문자의 글자 모양은 활자로 옮길 수 없으므로 학계 관행의 로마자 전사로 적는다.
로제타석 같은 완전한 이중언어 비문은 아니다. 두 글의 길이도 내용도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같은 대상을 향한 같은 성격의 헌사가 두 문자로 나란히 붙어 있었기에 대조가 가능했다. 낱말 하나가 맞아떨어지면서, 셈어 화자가 이집트 문자를 빌려 자음 알파벳을 만들었다는 가설 전체가 지지를 얻었다.
이 판독은 곧바로 확장되었다. 쿠르트 제테와 로베르트 아이슬러가 같은 명문에서 앞쪽 글자를 더 읽어 m-ʾ-h-b-ʿ-l-t로 제시했고, 후대 학자들이 다른 명문으로 해석을 넓혔다. 윌리엄 올브라이트가 1948년과 1969년에, 벤야민 사스가 1988년에 체계적인 재검토를 내놓았다. 세부 판독에는 이견이 많지만 가디너·제테·아이슬러가 제시한 기본 틀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문자에는 모음 기호가 없다. 자음만 적는 체계였고, 그 뒤를 이은 페니키아 문자와 히브리·아람·아랍 문자도 마찬가지였다. 기호를 아끼려는 편의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렇지 않다. 원인은 셈어의 문법 구조에 있다.
자음 세 개만 적어도 어느 어근인지 알 수 있고, 문맥이 있으면 어떤 형태인지도 대개 짚인다. 모음까지 적는 것은 셈어 화자에게 불필요한 수고였다. 이집트어 역시 자음만 적는 문자 체계였으므로, 빌려올 원형이 이미 그 모양이었다는 사정도 겹친다.
같은 이유로 이 체계는 다른 유형의 언어에 그대로 쓸 수 없다. 모음이 어휘 의미를 가르는 인도유럽어에서 자음만 적으면 글이 읽히지 않는다. 뒤에 그리스인이 손을 댄 지점이 정확히 여기다. 문자의 형태가 그것을 만든 언어의 구조에 맞추어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문자가 언어와 무관하게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도구가 아님을 보여준다.
가디너는 1916년 논문의 13~14쪽에서 이 명문들을 제12왕조, 곧 기원전 2000년기 초로 비정했다. 세라비트에서 이집트의 광산 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라는 것이 근거였다.
반론이 곧 나왔다. 조제프 라이보비치가 1934년과 1963년에 기원전 1500년 이후, 곧 제18왕조 이후로 내려잡았고 올브라이트와 요세프 나베가 이 견해를 받아들였다. 앙드레 르메르는 2017년 글에서 기원전 18~17세기 힉소스 지배기에 팔레스타인 남부나 이집트 삼각주에서 발달했을 것으로 보았다.
가장 극적인 것은 벤야민 사스의 입장 변화다. 사스는 1988년 『알파벳의 기원과 기원전 2000년기의 발달』에서 이른 연대를 지지했다가, 2000년대 초에 스스로 그 입장을 철회하고 알파벳이 기원전 14세기나 13세기 초에 태어나 곧 레반트에 나타났다고 다시 썼다.
연대를 다시 끌어올린 것은 세라비트 명문들을 함께 출토된 이집트 유물·인명과 대조한 최근의 재검토다. 이 작업은 원시시나이 명문이 세누스레트 3세와 아메넴하트 3세·4세 치세의 집중적 광산 원정 기간, 곧 기원전 1850~1800년경에 몰려 있다고 보고, 이중언어 조각인 시나이 345를 세누스레트 3세 시기로 비정했다. 스핑크스 자체가 연대의 기준점 역할을 한다.
발명의 주체를 두고도 견해가 나뉜다.
오를리 골드바서는 2006년 학술지 Ägypten & Levante 16권(121~160쪽)에 실은 「상형문자를 읽는 가나안인」에서, 이집트 문자를 읽지 못하는 셈어 화자들이 그림 기호를 자기 식으로 재해석해 만들었다고 보았다. 문자 체계의 내부 논리를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기호를 그림으로만 보고 새 원리를 끌어낼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반대 방향의 견해도 있다. 존 다넬과 데버라 다넬 부부는 1998년 이집트 서부 사막의 와디 엘홀에서 비슷한 계통의 명문 두 점을 찾았다. 나일강이 크게 굽어 도는 케나 만곡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지점이다. 편찬 보고는 2005년 The Annual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59권에 존 다넬, 프랭크 돕스올솝, 메릴린 룬드버그, 카일 매카터, 브루스 주커먼, 콜린 마나사의 공저로 실렸고, 연대는 중왕국 말기, 곧 제12왕조 말과 제13왕조 이른 시기로 잠정 비정되었다. 발견자들은 이 문자를 만든 주체로 셈어 노동자 대신 이들을 관리하던 이집트 서기 계층을 지목했다. 곡괭이를 든 가나안인이 아닌, 그들을 감독하던 사람이 만들었다는 견해다.
와디 엘홀 명문에 대해서는 판정 자체에 이견이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초기 알파벳으로 보지만, 루트비히 모렌츠는 2011년 저서에서 이 명문들을 정식 이집트 상형문자 명문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든 이 발견이 확정한 사실은 하나 있다. 초기 알파벳 사용이 시나이에 국한되지 않고 나일 계곡에서도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시나이와 와디 엘홀의 명문이 기원전 19~18세기이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초기 알파벳 명문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원전 13세기다. 그 사이 수백 년이 비어 있었다. 이 공백은 알파벳이 언제 어떤 경로로 북상했는지를 불확실하게 만들었고, 나다브 나아만은 2020년 학술지 Tel Aviv 47권(29~54쪽)에서 알파벳이 남부 레반트에 퍼진 시기를 후기 청동기 II, 곧 기원전 14세기 이전으로 올려잡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후보로 거론되던 유물은 여럿 있었으나 모두 연대에 문제가 있었다. 예즈르엘 계곡 텔 아부 주레이크의 풍뎅이 인장, 라키시 단검, 게제르 사금파리, 세켐 명판, 텔 나길라 사금파리가 그렇다. 이 가운데 중기 청동기 지층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것은 1934년 라키시 무덤 1502에서 나온 청동 단검 하나뿐이었고, 사스는 이마저 뒤에 초기 알파벳이 아닐 수 있다고 유보했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이 2018년 텔 라키시 발굴이다. 펠릭스 회플마이어, 하가이 미스가브, 린델 웹스터, 카타리나 슈트라이트가 2021년 학술지 Antiquity 95권 381호(705~719쪽)에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키프로스산 화이트 슬립 II 우유 사발의 테두리 조각 약 40×35밀리미터에 검은 잉크로 두 줄이 적혀 있었고, 각 줄에 세 글자씩 판독되었다. 윗줄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ʿ-b-d로 읽히는데 셈어로 종을 뜻하며 인명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 아랫줄은 n-p-t로 히브리어에서 꿀이나 감로를 뜻한다.
중요한 것은 연대 측정 방식이다. 이 조각은 불탄 층과 직접 접촉한 상태로 출토되었고, 같은 층에서 나온 보리 낟알 두 알을 흐로닝언과 취리히 공대의 가속기 질량분석 시설에서 각각 측정했다. 두 측정값 모두 기원전 15세기에 떨어졌다. 27개 측정값과 15개 이상의 연속 층을 넣은 베이즈 모형으로 조정한 결과는 기원전 1460~1430년(1시그마), 기원전 1485~1425년(2시그마)이었다. 고문자학적 추정 대신 방사성탄소 연대로 고정된 값이라는 점에서 이전 자료들과 성격이 다르다.
연구진의 결론은 초기 알파벳이 남부 레반트에 늦어도 기원전 15세기 중엽에는 쓰이고 있었고, 확산 시점은 중기 청동기 말과 이집트 제2중간기, 곧 서아시아 출신 왕조인 힉소스가 나일 삼각주를 지배하던 시기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이는 알파벳 확산을 후대 이집트 지배의 결과로 보는 나아만의 설명과 정면으로 갈라진다.
2024년 11월, 존스홉킨스대학의 고고학자 글렌 슈워츠가 미국 해외연구협회 연례총회에서 시리아 서부 텔 움 엘마라 출토 유물을 발표했다. 청동기 초기 무덤에서 나온 손가락 길이의 점토 원통 네 점으로, 연대는 기원전 2400년경이다. 기존에 알려진 알파벳 문자보다 약 500년 앞선다.
무덤에는 유골 여섯 구와 함께 금·은 장신구, 조리 도구, 창끝, 온전한 토기가 들어 있었다. 원통들은 토기 옆에서 나왔고 구멍이 뚫려 있어, 끈으로 다른 물건에 매달아 이름표처럼 썼으리라는 것이 슈워츠의 추정이다.
이 발표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슈워츠는 이미 2021년 학술지 Pasiphae 15권(255~266쪽)에 「기원전 3000년기 움 엘마라의 비쐐기문자: 초기 알파벳 전통의 증거인가?」를 실어 같은 자료를 학술적으로 제기해 두었다. 제목 끝의 물음표가 움 엘마라 원통의 지위를 그대로 보여준다.
유보할 이유는 분명하다. 기호가 스무 개 남짓인 짧은 자료라 판독이 불가능하고, 알파벳인지 물건을 구별하는 단순 표시 기호인지 확정할 방법이 없다. 그 자체로 읽히지 않는 기호 묶음은 어느 방향으로도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발굴지가 시리아 서부라는 점은 흥미롭지만, 이집트 상형문자를 매개로 한 시나이·와디 엘홀 계열과 어떤 관계인지도 미정이다.
세라비트의 스핑크스에서 알파벳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 문자는 이미 시나이의 바위와 나일 계곡의 절벽에 새겨져 있었고, 20년 넘게 미해독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조각이 특별한 것은 이집트 상형문자 헌사와 정체불명 문자 명문이 같은 대상을 향해 나란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가디너가 두음법을 적용해 여섯 글자에서 바알라트를 읽어낸 순간, 셈어 화자가 이집트 그림 기호를 빌려 자음 알파벳을 만들었다는 가설이 검증 가능한 주장이 되었다.
그 알파벳이 자음만 적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셈어는 자음 세 개가 어휘 의미를 담고 모음이 문법 정보를 담는 구조이므로, 자음만 적는 표기가 실제로 작동했다. 문자의 형태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언어 구조가 결정했다.
확정된 것은 여기까지다. 발명 시점을 두고 기원전 19세기부터 13세기까지 폭이 열려 있고, 사스처럼 자기 주장을 철회한 연구자도 있다. 만든 주체가 광산 노동자였는지 이들을 감독한 이집트 서기였는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시리아의 점토 원통이 500년을 더 끌어올릴지, 아니면 알파벳과 무관한 표시 기호로 판명될지도 열려 있다.
이 불확실성의 성격을 보면 한 가지가 드러난다. 알파벳 초기사의 쟁점은 대부분 판독보다 연대와 맥락에 걸려 있다. 글자를 읽는 일은 100년 전에 해결되었고, 그 글자가 언제 어디서 누구의 손에 처음 놓였는지가 남았다. 라키시 사금파리가 보여주듯 이 문제를 움직이는 것은 새로운 해석보다 새로운 측정이다. 고문자학적 추정으로 순환하던 논쟁에 방사성탄소 연대가 하나 들어오자 300년의 공백이 메워졌다. 세라비트 명문 자체에는 아직 그런 측정이 적용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