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열기는 중재와 서약, 명목상의 종주권, 변방 세력의 통합이라는 구조를 공유한다. 그러나 두 시대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의 격차는 사회의 격차가 아닌 남은 자료의 종류에서 나온다. 수메르에 정치 사상이 없었다는 서술은 자료가 없다는 사실을 사실이 없다는 결론으로 바꿔 읽는다.
여러 나라가 하나의 문화권 안에서 오래 싸우다가 한 나라가 전체를 통합하는 과정은 세계사에서 반복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도시 국가 시대와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가 그런 사례로 함께 거론된다.
비교는 유용하다. 같은 조건에서 비슷한 제도가 나오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교에는 조건이 붙는다. 두 시대에 관해 남은 자료의 종류가 다르면, 비교로 드러나는 차이가 사회의 차이인지 기록의 차이인지 구분해야 한다.
이 글은 두 시대를 나란히 놓고 세 가지를 순서대로 다룬다. 구조에서 실제로 겹치는 부분, 규모에서 벌어지는 부분, 그리고 그 규모의 차이를 보여 주는 숫자들이 어떤 종류의 문서에서 나왔는지다.
두 시대는 시간적으로 크게 떨어져 있다. 수메르 도시 국가들이 서로 싸우던 초기 왕조 시대는 기원전 2900년 무렵부터 2350년 무렵까지다. 중국의 춘추 시대는 기원전 770년에 시작해 기원전 5세기까지 이어지고, 전국 시대는 기원전 221년 진의 통일로 끝난다.
1600년 이상 떨어져 있다. 두 지역 사이에 이 제도들이 전해졌다고 볼 근거도 없다. 그러므로 이 비교는 영향 관계를 찾는 작업이 아니라,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한 구조가 독립적으로 나타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두 시대 모두에서 국가 간 분쟁이 제3자의 중재와 신 앞의 서약으로 처리되었다.
수메르 쪽의 사례는 라가시와 움마의 국경 분쟁이다. 기원전 2600년에서 2350년 사이, 곧 초기 왕조 3기에 벌어졌고 국가 사이의 전쟁 가운데 기록이 가장 잘 남은 최초 사례다. 분쟁의 대상은 구에데나라는 경작지였고, 가로 10킬로미터 세로 4킬로미터 정도의 관개 계곡이었다.
여기서 중재자로 등장하는 인물이 키시의 지배자 메실림이다. 그는 라가시와 움마보다 북쪽에 있던 도시의 왕이었고, 두 강 사이 도시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 안에서 관례적인 패권 지위를 갖고 있었다. 협정은 그의 권위 아래 외부 중재의 형식으로 체결되었다.
조지프 쿠퍼가 1983년에 낸 『Reconstructing History from Ancient Inscriptions: The Lagash-Umma Border Conflict』가 이 자료를 정리했다. 쿠퍼의 재구성에 따르면 라가시의 에안나툼은 움마와 적어도 두 차례 싸웠고, 두 번째 전쟁 뒤의 처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움마의 지배자 에나칼레와 땅을 나누고 경계를 따라 무인 지대를 설정했으며, 자신의 경계비를 세우고 훼손되어 있던 메실림의 비를 복원했다. 경계 둔덕 위에 엔릴과 닌후르사가와 닌기르수와 우투를 위한 단을 지었다. 그리고 움마의 지배자에게 국경을 넘지 않겠다는 서약을 신들 앞에서 하게 했다.
중국 쪽의 대응물은 회맹이다. 주 왕실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제후국 사이의 회합이 잦아졌고, 회합에서 맹세를 걸어 합의를 구속했다. 『춘추』는 이 회합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동시대의 증거를 제공하고 거기서 엄숙하게 맺어진 맹약을 기록한다.
두 사례에서 구속력의 원천이 같다. 상위 기구의 강제력이 아닌 신 앞에서 한 맹세였다. 위반은 계약 위반이자 신에 대한 위반으로 규정되었고, 그것이 합의를 지탱했다.
두 시대 모두에서 실제 권력과 정통성의 발급처가 분리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주 왕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춘추 시대 초기에 주 왕실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도덕적 설득력을 행사했지만 실제 권력은 크게 줄어 있었다. 기원전 707년에는 주 왕실을 지지하던 정(鄭)이 옛 동맹을 공격했고 정의 관리가 왕의 어깨에 화살을 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럼에도 제후 가운데 어느 쪽도 왕을 자처하지 않았다. 대신 패자라는 지위가 생겼다. 『좌전』은 노 장공 15년, 곧 기원전 679년에 제후들이 견(鄄)에서 회합했고 제(齊)가 처음으로 패자 노릇을 했다고 적는다. 패자의 명분은 왕을 받들고 이민족을 물리친다는 것이었다.
수메르에서 같은 기능을 한 곳이 니푸르다. 이 도시는 군사적으로 강하지 않았고 패권을 다툰 기록도 없다. 그러나 수메르 신들의 우두머리인 엔릴의 신전 에쿠르가 이곳에 있었고, 남부를 장악한 지배자는 이곳에 봉헌하고 건물을 보수한 사실을 비문에 남겨야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두 체제에서 같은 일이 일어난다. 무력을 가진 쪽과 그 무력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쪽이 서로 다른 곳에 있었고, 그 덕분에 패권자가 바뀌어도 정당화의 형식은 유지되었다.
두 분열기의 종결 방식도 겹친다. 중심부의 강국이 아닌 문화권 가장자리의 군사 국가가 전체를 통합했다.
수메르 도시 국가 체제는 북쪽 아카드의 사르곤이 기원전 2350년 무렵 수메르를 정복하면서 끝났다. 모겐스 헤르만 한센은 세계사에서 확인되는 도시 국가 문화 37개를 비교한 조사에서 수메르 도시 국가 시대를 기원전 3100년 무렵부터 이 정복까지로 잡는다. 아카드 왕조가 무너진 기원전 2150년 무렵 도시 국가가 잠시 되살아났지만, 우르 제3왕조가 기원전 2100년부터 2000년 사이에 이들을 왕국 안의 속주로 바꾸었다.
중국에서는 서쪽 변방의 진이 기원전 221년에 통일했다.
그 이후의 경로는 다르다. 진은 15년 만에 무너졌지만 한이 통일 체제를 이어받았고, 이후 오랫동안 통일 제국이 정상 상태로 간주되었다. 아카드 왕조와 우르 제3왕조는 각각 150년과 100년 남짓 유지되고 무너졌으며, 메소포타미아는 다시 분열했다. 수메르어는 기원전 2000년 무렵 일상어로서 쓰이지 않게 되었고 수메르인이라는 집단도 사라졌다.
구조가 겹친다고 해서 규모까지 비슷한 것은 아니다. 두 체제의 정치 단위는 종류가 다르다.
수메르의 단위는 도시 국가였다. 성벽 도시 하나와 거기 딸린 관개 농지로 이루어졌고, 우루크와 우르와 라가시가 대표적이다. 분쟁의 대상도 그 규모에 맞았다. 구에데나는 40제곱킬로미터 남짓한 경작지다.
전국 시대의 단위는 영역 국가였다. 초와 진과 제는 오늘날의 여러 성에 걸친 영토를 가졌고, 전쟁의 목표도 경작지 경계의 조정에서 상대 국가의 병합으로 달라졌다.
도시 국가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이 차이를 전제한다. 노먼 요피가 2000년 『Paléorient』에 쓴 서평의 정리에 따르면, 이 개념은 공통의 문화를 공유하면서 여러 작은 정치 공동체로 나뉜 지역을 가리키고, 그 공동체들은 서로 대등한 정치체로서 교역과 종교 축제를 위해 경계를 넘나든다. 춘추전국의 후반부는 이 틀에 들어맞지 않는다.
두 시대의 전쟁 규모를 대비할 때 자주 인용되는 숫자가 있다. 이 숫자들을 나란히 놓기 전에 그것이 어떤 문서에서 나왔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수메르 쪽 숫자는 이렇다. 라가시와 움마의 전쟁에서 움마 측 사망자는 100명에서 200명 정도로 추정되며 이는 그들 군대의 대부분이었고, 라가시의 손실은 적었다. 이 숫자의 출처는 라가시가 세운 승전 기념물이다. 알려진 비문은 모두 라가시에서 나왔으므로 라가시의 시각만 담고 있고, 왕실 기념물은 패배를 적지 않는다.
중국 쪽 숫자는 장평 전투에서 나온다. 사마천의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이 전투의 결말을 이렇게 적는다.
括軍敗,卒四十萬人降武安君。……乃挾詐而盡阬殺之,遺其小者二百四十人歸趙。前後斬首虜四十五萬人。
조괄의 군대가 패하고 병졸 40만 명이 무안군에게 항복했다. …… 이에 속임수를 써서 그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그중 어린 자 240명만 남겨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앞뒤로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45만 명이었다.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한문 원문은 중국어 위키문헌 『사기』 권73. 옮김은 필자.
이 숫자는 전투로부터 150년 이상 지난 뒤에 쓰였다. 현대 연구는 이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병참이 첫 번째 근거다. 병사 한 사람이 하루에 곡물 1석을 소비한다고 잡으면, 그만한 손실이 날 규모의 군대를 장기간 유지하는 일이 수송 능력으로 감당되지 않는다. 인구가 두 번째 근거다. 조나라의 남성 인구는 100만에서 2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 가운데 45만이 한 전투에서 사라지면 농업 노동력이 유지되지 않는다. 실제 유효 병력을 10만에서 20만 명 사이로 보는 추정이 이런 계산에서 나온다.
다만 사건 자체가 지어낸 것은 아니다. 당 현종이 그곳의 유해 일부를 모아 사당을 세웠고, 지금도 그 지역에서 흩어진 뼈와 집단 매장지가 발견된다.
여기서 두 숫자의 성격을 대비해 보면 비교의 조건이 드러난다. 한쪽은 사건 150년 뒤에 서술 사료를 쓴 역사가의 숫자이고, 다른 쪽은 사건 직후에 승자가 세운 기념비에서 추산한 숫자다. 전자는 과장의 방향으로, 후자는 승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각각 편향된다. 두 숫자를 나란히 놓고 전쟁 규모가 몇 배 차이 난다고 말하려면 그 편향의 크기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두 경우 모두 그 크기를 모른다.
규모 차이 자체는 다른 근거로도 확인된다. 정치 단위가 도시와 영역 국가로 달랐고, 동원 가능한 인구가 달랐으며, 무기도 청동과 철로 달랐다. 그러나 이 서술은 숫자 없이 성립하고, 숫자를 끌어들이는 순간 자료의 성격 문제가 따라 들어온다.
두 시대를 비교할 때 가장 크게 벌어지는 항목이 사상이다. 전국 시대에는 유가, 묵가, 도가, 법가가 경쟁했고 국가와 인간에 관한 논변이 대량으로 남았다. 수메르에는 그에 대응하는 것이 없다.
이 대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대비에서 수메르 사회에 정치 사상이 없었다는 결론을 끌어내려면 한 단계가 더 필요하다. 그런 사상이 있었다면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라는 전제다.
이 전제가 성립하는지를 자료 종류로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쪽에는 서술 사료가 있다. 『춘추』는 노나라의 궁정에서 기원전 722년부터 481년까지 기록한 연대기이고, 『좌전』은 그 연대기에 사건의 경위와 인물의 말을 붙인 주석 전통이다. 회합과 맹약이 남은 것도, 패자라는 개념이 언제 처음 쓰였는지 알 수 있는 것도 이 사료들 덕분이다. 전국 시대의 논변들은 각국이 인재를 구하던 상황에서 문헌으로 정리되어 전해졌다.
수메르 쪽에는 이런 종류의 문서가 없다. 남은 것은 행정 장부와 왕의 업적 비문과 신전 문헌이다. 장부는 논쟁을 적지 않고, 왕의 비문은 패배와 반대를 적지 않는다.
수메르 왕명록이 이 사정을 보여 준다. 이 문서는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와 한 번에 한 도시에만 머물다가 다른 도시로 옮겨 간다는 형식으로 서술된다. 실제로는 여러 도시가 동시에 병립했으므로 이것은 사실 기록이 아니다. 피오트르 미할로프스키가 1983년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3권에 실은 논문 「History as Charter: Some Observations on the Sumerian King List」는 이 문서를 정치적 교의를 퍼뜨리기 위한 문헌으로 읽는다. 왕권이 한 시점에 한 도시에서만 한정된 기간 행사된다는 교의이며, 이신 왕조 초기의 지배자들이 이를 이용했다는 지적이 따른다.
이것은 정치 사상이다. 형식은 논변이 아닌 목록이고, 반대 의견을 담는 자리가 없다. 수메르에도 왕권에 관한 관념은 있었다. 없었던 것은 그 관념을 서로 다른 주장으로 나누어 기록하는 장르다.
실물 자료와의 관계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주세페 마르케시가 2015년 『History & Philology』에 쓴 초기 왕조 시대 상대 연대기는 왕명록의 숫자를 아예 쓰지 않고, 기념 비문과 행정 문서, 계보와 동기화 정보, 고문자학과 언어학 분석, 고고학적 맥락으로 연대를 짠다. 수메르사를 재구성하는 일은 서술 사료 없이 진행된다.
그러므로 수메르에 백가쟁명이 없었다는 진술은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다. 그런 논쟁이 실제로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런 논쟁을 적는 문서 장르가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남은 자료로는 두 해석을 구분할 방법이 없다.
수메르 도시 국가 체제와 중국 춘추전국 시대는 세 가지 구조를 공유한다. 신 앞의 맹세로 구속되는 도시 간 협정과 제3자의 중재, 실제 권력과 분리된 정통성 발급처, 그리고 문화권 가장자리 세력에 의한 통합이다. 이 세 항목은 서로 다른 종류의 자료로 각각 확인되므로 비교가 성립한다.
비교가 곧바로 성립하지 않는 항목은 둘이다. 전쟁 규모와 사상 생산이다. 두 항목 모두 판단의 근거가 한쪽에만 존재하는 종류의 문서에서 나온다. 장평의 45만은 사건 150년 뒤의 서술 사료에 적힌 숫자이고 현대 연구는 병참과 인구를 근거로 이를 크게 낮춰 잡는다. 라가시의 100명에서 200명은 승자가 세운 기념비에서 추산한 숫자다. 백가쟁명의 유무를 판정하려면 논변을 적는 장르가 두 문명에 모두 있었어야 하는데, 한쪽에만 있었다.
여기서 통상적인 비교 서술 하나가 조건부가 된다. 수메르의 전쟁은 작았고 중국의 전쟁은 컸다는 서술, 그리고 수메르에는 사상이 없었고 중국에는 있었다는 서술이다. 앞쪽 서술은 정치 단위의 크기와 동원 인구로 따로 확인되므로 숫자 없이도 성립한다. 뒤의 것은 그런 대체 근거가 없다.
이 정리가 가리키는 문제는 고대사 비교 전반에 걸친다. 문명 사이의 우열이나 성숙도를 비교하는 서술 대부분이 남은 문서의 장르 구성에 의존하고, 그 구성은 그 사회가 무엇을 생각했는지보다 무엇을 적어 두는 관행을 가졌는지를 반영한다. 두 조건을 분리할 수 있는 사례에서만 비교의 결론이 사회에 관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