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 삼각주 동부의 한 유적에서 500년치 지층이 끊기지 않고 나왔다. 이곳은 서셈족 주민이 몇 세기에 걸쳐 살다가 이집트 북부를 지배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집트 문헌이 전하는 정복과 축출은 지층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집트 제15왕조의 수도 이름은 아바리스였다. 이집트어로는 흐와트와레트이며 '지구의 저택'이라는 뜻이다. 이 왕조를 세운 세력을 힉소스라 부르는데, 이집트어 헤카우 하수트, 곧 '외국 땅의 통치자들'을 그리스식으로 옮긴 말이다. 재위 기간은 대략 기원전 1638년에서 1530년이다.
이 수도를 찾는 작업은 한 세기 가까이 헤맸다. 1885년 에두아르 나빌이 나일 삼각주 동부의 텔 엘다바에 처음 삽을 댔다. 1929년과 1939년에는 피에르 몽테가 여기서 북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을 아바리스로 보고 발굴했고, 이 비정이 한동안 널리 받아들여졌다. 나중에 그곳은 타니스로 밝혀졌다. 1941년과 1942년 이집트 고대유물청을 위해 텔 엘다바를 조사한 라비브 하바치가 이곳이 아바리스라고 주장했다.
결정적 확인은 1966년부터 나왔다. 오스트리아 카이로 고고학연구소의 만프레트 비타크가 장기 발굴에 들어가 비이집트계 주민이 대규모로 거주한 층을 찾아냈고, 이 자료로 아바리스 비정을 확립했다. 2010년 10월부터는 이레네 포르스트너뮐러가 발굴을 이어받았다.
이 유적은 출애굽 논의에서 자주 인용된다. 삼각주 동부에 셈족 도시가 있었고, 그 주민이 이집트 왕조와 갈라섰으며, 후대에 이 일대가 람세스의 수도권으로 편입되기 때문이다. 이 글이 확인하려는 논지는 하나다. 텔 엘다바는 셈족 집단이 이집트 삼각주에 몇 세기 동안 살았다는 사실을 물질 자료로 확정하지만 출애굽 서사를 확정하지 않으며, 이집트 문헌이 전하는 정복과 축출조차 이 유적의 지층과 어긋난다.
텔 엘다바의 가치는 유물 하나에 있지 않고 지층에 있다. 면적 약 2제곱킬로미터의 유적에 500년이 넘는 거주층이 연속으로 쌓여 있어, 청동기 중기 이집트와 레반트의 편년을 맞대는 기준 자료로 쓰인다. 지하수위가 높고 농경지 아래에 묻혀 있어 발굴 조건은 나쁘다.
가장 아래에는 제12왕조가 시작되던 기원전 20세기에 이집트 왕실이 세운 계획도시가 있다. 격자형 구획과 규격화된 주택이 나오는데, 국경 지대에 왕실이 조성한 관제 도시의 전형이다. 원래 지명은 로와티였고 '두 길의 문'이라는 뜻이다.
제12왕조 후반부터 서아시아 계통 주민이 들어오기 시작해 제13왕조에 급격히 늘어난다. 비타크는 이 이주가 중왕국 후기부터 신왕국 초까지, 대략 기원전 1850년에서 1530년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정리한다. 이후 힉소스 시대를 거쳐 제18왕조가 시작될 무렵 큰 변화가 오고, 제19왕조 람세스 시대에 다시 쓰인다.
이 주민들이 이집트인이 아니었다는 판정은 여러 계열의 증거가 함께 받친다.
건축이 첫 번째다. 시리아와 레반트식 주택 평면이 나온다. 가운데 넓은 방을 두고 작은 방을 붙인 형식, 가로로 긴 방을 쓰는 형식, 화덕을 갖춘 형식이 함께 확인되며 이집트 주택 평면과 구분된다. 신전도 가로로 긴 방을 쓰는 레반트식이고, 이집트 문헌에서 세트와 동일시되는 폭풍신을 모셨다.
매장 관습이 더 강한 표지다. 이집트인은 묘지를 취락 밖에 두지만 이 주민들은 집 안이나 마당에 시신을 묻었다. 무덤 입구 바깥에 당나귀를 한두 마리 함께 묻은 사례가 여럿 있는데, 청동기 중기 레반트의 관습이다. 남성 무덤에는 청동 단검과 도끼가 부장되고 여성 무덤에는 토글핀이 나온다. 토글핀은 서아시아식 옷을 왼쪽 어깨에서 여미는 데 쓰는 핀이라 종족 표지로 쓰인다.
비타크의 관찰 가운데 자주 간과되는 대목이 있다. 이 표지들이 도시 전역에 고르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관찰이다. 중왕국 취락 바로 남쪽 구역에서는 힉소스 시대에도 집 안 매장이 나오지 않고 토글핀도 나오지 않는다. 도시 주민이 단일 집단이 아니었고 출신에 따라 구역을 나누어 살았다는 뜻이다. 이 관찰은 이 도시를 하나의 민족 집단으로 묶어 읽으려는 시도에 제동을 건다.
토기는 레반트 청동기 중기 형식과 이집트 형식이 섞여 나오고, 시간이 갈수록 두 전통이 혼합된 이 지역 고유 형식으로 굳는다. 키프로스산 수입 토기도 늘어난다. 이 도시가 육로와 해로가 만나는 교역 결절이었기 때문이다. 인명 자료는 적지만 남은 것은 거의 서셈어계 이름이고, 비타크는 편의상 이들을 아모리인으로 부른다.
골격 자료에서는 남녀의 형질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빈대학교의 형질인류학자 아이케 빙클러가 확인한 결과이며,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유전자 풀에서 왔을 때 나타나는 양상이다. 남자는 현지 집단이고 아내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구조를 가리킨다.
힉소스가 어떻게 권력을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하나의 이야기가 통용되었다. 북동쪽에서 밀고 들어온 침략군이 삼각주를 정복했다는 서술이다. 이 서술의 출처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이집트 사제 마네토인데, 그는 힉소스 왕조보다 1200년 뒤 사람이다.
2020년 크리스 스탠티스가 이끄는 연구진이 학술지 『플로스 원』 15권에 실은 논문이 이 통념을 검증했다. 방법은 스트론튬 동위원소 분석이다.
연구진은 텔 엘다바에 묻힌 75명의 치아 법랑질을 분석했다. 시료의 절반가량은 힉소스 집권 이전 350년 사이에 묻힌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힉소스 통치기에 묻힌 사람들이다.
결과는 통념과 반대였다. 비현지 출신의 유입은 힉소스 왕조 이전, 곧 제12왕조와 제13왕조 시기에 두드러졌다. 힉소스 통치기에는 삼각주에서 태어난 사람의 비율이 오히려 더 높았다. 비현지 출신 가운데 여성의 비중이 높아, 아내가 남편 쪽으로 이주하는 혼인 거주 방식을 시사한다. 침공 모형이 예측하는 남성 유입 증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양상이 가리키는 그림은 이렇다. 여러 출신이 뒤섞인 항구 도시에서 몇 세대를 살아온 집단이, 자기가 이미 익숙한 체제 안에서 권력을 잡았다. 지배층의 뿌리가 근동이라는 점은 유지되지만 집권 경로는 정복이 아니다. 스탠티스는 힉소스 통치 이전에 여성 중심의 이주가 늘었다는 점을 들어, 경제와 문화의 변화가 외국계 지배로 이어졌다고 정리했다.
이 결과를 출애굽 논의에 옮길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여기서 확인된 것은 한 셈족 집단이 이집트에 정착해 세대를 거쳐 지배층으로 올라가는 경로이지, 그 집단이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스트론튬 값은 사람이 어디서 자랐는지만 말하고 그가 어느 민족이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힉소스 지배의 끝에 대해 이집트 왕실 문헌은 한 방향으로 서술한다.
남쪽 테베의 제17왕조 왕들이 축출 전쟁을 시작했다. 세케넨레 타오의 미라에는 치명적인 머리 상처가 여럿 남아 있다. 이 미라는 1881년 데이르 엘바흐리의 왕실 은닉처에서 발견되었고 1960년대에 엑스선 촬영이 이루어졌다. 2021년 2월 카이로대학교 의과대학 방사선학 교수 사하르 살림과 전 고대유물부 장관 자히 하와스가 학술지 『프론티어스 인 메디슨』 8권에 컴퓨터단층촬영 연구를 실었다.
이 연구는 새 상처를 찾아냈다. 방부처리한 사람들이 재료를 덮어 감춘 두개골 오른쪽 측면 골절이다. 손의 변형은 왕이 손을 뒤로 묶인 채 붙잡혀 있었음을 시사하고, 상처가 얼굴에 집중되어 있으며 방어 상처가 없다. 연구진은 텔 엘다바에서 나온 서아시아식 무기 다섯 점과 상처의 크기와 모양을 대조해 잘 들어맞는다고 보고했다. 결론은 왕이 전장 근처에서 붙잡혀 여러 사람에게 의례적으로 처형당했다는 쪽이다. 사망 당시 나이는 40대로 추정되었다.
다음 왕 카모세는 카르나크에 석비를 세워 자기 원정을 기록했고, 여기에 아바리스 포위가 언급된다. 카모세의 기록은 재위 3년에서 끊기고 아흐모세가 전쟁을 이어받는다. 아흐모세 밑에서 복무한 병사 이바나의 아들 아흐모세가 남긴 자서전은 아바리스의 파괴와 힉소스 축출을 적는다.
문제는 이 서술이 발굴 결과와 맞물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국 이집트연구센터가 정리한 힉소스 항목은 이바나의 아들 아흐모세의 자서전이 아바리스의 파괴를 기록하지만 그러한 파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적는다.
비타크 본인의 서술이 더 구체적이다. 그는 아흐모세의 아바리스 정복이라는 정치적 단절 이후에도 힉소스 시대 주민의 상당 부분이 이어졌다는 주장이 성립한다고 보았다. 근거는 토기다. 청동기 중기 형식과 이집트 형식이 섞인 이 지역 고유의 토기 생산이 투트모세 시대까지 거의 끊기지 않고 계속되며, 텔 헤브와 유적의 자료도 같은 연속성을 보인다. 그는 이 연속성이 힉소스 시대 주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뜻이며 일부는 군역에 동원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적었다. 정복 직후 도시 대부분이 비워지지만 세트 신전 구역만은 활동이 끊기지 않고 아마르나 시대까지 이어졌다고도 정리했다.
반대 방향의 자료도 있다. 힉소스 시대 후반 층에서 화재 흔적과 무너진 구조물을 확인하고 이를 아흐모세의 포위와 연결하는 서술이 있으며, 에즈베트 헬미 구역에서는 외상 흔적이 있는 18세에서 45세 남성의 매장이 말과 당나귀 구덩이와 함께 나와 군영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 해석에는 반론이 붙어 있어 확정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를 정리하면 이렇다. 도시가 한 번에 불타고 주민이 쫓겨났다는 단순한 그림은 유지하기 어렵다. 지배층이 교체되었고 주민의 상당수는 남았다고 보는 쪽이 자료에 더 맞는다. 출애굽 서사와 힉소스 축출을 겹쳐 읽으려는 시도는 '한 집단이 이집트를 떠났다'는 사건을 필요로 하는데, 텔 엘다바의 지층은 그 집단이 떠나지 않고 남았다고 말한다.
제13왕조 말의 층에서는 다른 종류의 위기가 확인된다. 비타크는 G/1에서 G/3으로 표기되는 층의 끝에서 급하게 판 응급 매장 구덩이가 서로 다른 두 발굴 구역에 동시에 나타난다고 보고했고, 이 현상을 두 구역의 지층을 맞대는 기준점으로 삼았다. 다수의 사망을 낳은 사건이 있었다는 정황이지만 원인과 정확한 연대는 확정되지 않았다.
텔 엘다바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개별 유물은 부서진 석상이다.
F/I 구역에서 제13왕조 전반에 쓰이던 궁전형 건물이 폐기된 뒤 그 폐허에 무덤들이 들어섰다. 이 구역에서 1979년부터 1989년까지 500기에 가까운 무덤이 발굴되었고, 연대는 후기 중왕국에서 신왕국 초까지 약 300년에 걸친다. 그중 남동쪽 묘역의 한 무덤에서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석상 파편이 나왔다. 무덤은 거의 정사각형인 상부 구조에 매장실을 두고 예배당을 덧붙인 형식이고, 석상 파편은 예배당에 뚫린 도굴 구덩이에서 나왔다.
석상은 앉은 자세이고 실물의 1.5배 크기이며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 피부는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집트 미술에서 서아시아인을 나타내는 색이다. 머리는 버섯 모양으로 부풀린 형태이고 붉게 칠해져 있으며, 같은 시기 가나안 지배층의 도상과 일치한다. 오른쪽 어깨에는 던지기 막대가 걸쳐져 있는데,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외국인을 뜻하는 기호다. 석상은 의도적으로 부수어지고 훼손되었다. 비타크가 1996년 저서 20쪽에서 21쪽에 이 내용을 정리했고, 로베르트 시에스틀이 파편을 추가로 귀속시켜 전체 형태를 복원하는 연구를 내놓았다. 시에스틀은 이 무덤이 속한 묘역을 후기 제12왕조에서 초기 제13왕조의 층으로 정리한다.
데이비드 롤은 1995년 저서 『파라오와 왕들』 360쪽에서 367쪽에서 이 무덤을 요셉의 무덤으로 제시했다. 매장실에서 새김이 있는 석회암 석관 파편과 뼛조각 몇 점만 나오고 온전한 유골이 없었다는 점, 도굴 구덩이가 매장실까지 이어졌다는 점이 근거로 쓰였다. 창세기 50장 25절과 출애굽기 13장 19절이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갔다고 적기 때문이다.
이 해석은 발굴자를 포함한 이집트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 형식의 석상은 삼각주에 정착한 서아시아 고위 인물에게 일반적이다. 시나이반도의 세라비트 엘카딤을 비롯한 다른 유적에서도 이집트 왕실에 복무한 서아시아계 고관의 흔적이 나온다. 특정 인물로 좁힐 단서가 없다. 둘째, 무덤에서 유골이 사라지는 현상은 도굴로도 설명된다. 도굴꾼이 시신을 옮기는 일은 드물지만, 드문 일이 일어났다는 것과 특정 인물의 유골이 옮겨졌다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석상이 부서진 시점이 유골이 사라진 시점과 같은지조차 발굴 자료로는 정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지명 문제를 짚어야 한다. 출애굽기 1장 11절은 히브리인들이 국고성 피톰과 라암세스를 지었다고 적고, 이 구절이 텔 엘다바를 출애굽 논의로 끌어들이는 고리로 쓰인다.
람세스 2세의 수도 피람세스는 텔 엘다바가 아니라 북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콴티르에 중심을 두었다. 아바리스 구역은 피람세스라는 광역 도시의 남쪽 일부로 흡수되었다. 텔 엘다바와 라암세스를 곧바로 등치시키는 서술은 부정확하다.
연대 문제도 남는다. 힉소스 지배는 기원전 1530년 무렵에 끝난다. 출애굽의 이른 연대는 열왕기상 6장 1절을 계산한 기원전 1446년이고 늦은 연대는 기원전 1250년 무렵이다. 힉소스 축출과 앞쪽 안 사이가 80년 이상, 뒤쪽 안과는 280년 가까이 벌어진다. 마네토를 인용해 힉소스 축출과 유대인의 이집트 이탈을 겹쳐 놓은 것은 요세푸스의 『아피온 반박』인데, 이 문서는 기원전 2세기 이후 헬레니즘 세계에서 유대인의 기원을 놓고 벌어진 논쟁의 산물이지 청동기 자료가 아니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을 논지 기준으로 묶으면 세 갈래다.
첫째, 배경은 견고하다. 서셈족 주민이 기원전 19세기부터 나일 삼각주 동부에 들어와 몇 세기에 걸쳐 도시를 이루고 살았고, 자기 건축과 매장 관습을 유지한 채 이집트 문화와 섞였으며, 마침내 그 집단에서 나온 세력이 이집트 북부를 지배했다. 건축 평면, 집 안 매장, 당나귀 부장, 토글핀, 서셈어계 인명, 골격의 성별 차이가 서로 독립적으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여기에 2020년의 스트론튬 동위원소 분석이 더해져, 이 집단이 여러 세대에 걸친 이주로 자리 잡았다는 경로까지 확인되었다.
둘째, 이집트 문헌의 정복 서술과 지층이 어긋난다. 카모세 석비와 이바나의 아들 아흐모세 자서전은 아바리스의 파괴와 힉소스 축출을 적지만, 토기 생산이 투트모세 시대까지 이어지고 세트 신전의 활동이 끊기지 않았다는 발굴 결과는 주민의 상당수가 남았음을 가리킨다. 세케넨레 타오의 두개골 상처는 전쟁 자체가 있었음을 확증하지만,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과 주민이 쫓겨났다는 결론은 별개다.
셋째, 출애굽 서사로 옮기는 다리는 놓이지 않는다. 요셉의 무덤으로 지목된 F/I 구역의 석상은 삼각주에 흔했던 서아시아계 고관의 도상이고, 라암세스의 중심은 이 언덕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콴티르에 있었으며, 힉소스 축출 연대는 출애굽의 두 연대안과 80년에서 280년이 벌어진다. 마네토와 요세푸스의 연결은 헬레니즘 시대의 논쟁 문헌에 속한다.
이 유적이 논의에 기여하는 방식은 그래서 한정적이면서 분명하다. 히브리 조상들이 이집트에 체류했다는 서사가 그 시대의 실제 인구 이동 양상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동시에 그 서사의 개별 사건을 유물로 확정하려는 시도가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발굴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에즈베트 헬미 구역의 성격을 둘러싼 판단은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힉소스 지배의 끝에 대한 그림은 앞으로 더 정밀해질 여지가 있다. 그 정밀화가 어느 방향으로 가든, 지층이 말할 수 있는 것과 문헌이 주장하는 것을 구분해 두는 작업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