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뇌가 커진 이유를 조리에서 찾는 설명은 190만 년 전의 불을 요구한다. 확실한 화덕은 79만 년 전에야 나오고, 그 사이 110만 년이 비어 있다.
사람의 뇌는 몸무게의 2.5퍼센트 남짓을 차지하지만 기초대사량의 약 20퍼센트를 쓴다. 다른 영장류에서 이 비율은 평균 13퍼센트, 영장류가 아닌 포유류에서는 8~10퍼센트다.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 하루에 먹는 다섯 끼 가운데 한 끼는 뇌를 돌리는 데만 들어간다.
1995년 레슬리 아이엘로와 피터 휠러는 이 사실에서 문제를 끌어냈다(아이엘로·휠러, 1995, Current Anthropology 36권 2호 199~221쪽). 사람의 기초대사량은 몸 크기가 비슷한 다른 영장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뇌는 훨씬 크고 훨씬 많이 먹는다. 전체 예산이 같은데 한 항목이 커졌다면 다른 항목이 줄었어야 한다. 두 사람이 지목한 항목은 소화관이었다. 실제로 사람의 창자는 몸 크기로 예측되는 값보다 짧고, 특히 발효를 담당하는 결장이 작다. 이 설명을 비싼 조직 가설이라 부른다.
창자를 줄이려면 조건이 있다. 섬유질이 많고 소화가 어려운 먹이를 오래 발효시켜야 하는 식단으로는 짧은 창자가 버티지 못한다. 열량이 높고 소화가 쉬운 먹이로 바뀌어야 한다. 아이엘로와 휠러는 그 먹이로 고기와 골수를 지목했다.
2009년 리처드 랭엄은 같은 자리에 다른 답을 놓았다. 먹이의 종류가 바뀐 것보다 조리를 시작한 것이 변화를 일으켰다는 답이다. 불에 익히면 전분이 젤라틴화하고 단백질이 변성해 소화 효율이 오르고, 씹는 데 드는 시간과 힘이 줄며, 음식에 있던 세균과 기생충이 죽는다. 사람의 작은 이빨, 약한 턱, 짧은 창자가 모두 익힌 음식에 맞춰진 구조라는 것이 랭엄의 논지다. 이 설명을 요리 가설이라 부른다.
두 가설은 예측이 다르다. 비싼 조직 가설은 고기 섭취가 늘어난 시점을 요구하고, 요리 가설은 불을 일상적으로 쓴 시점을 요구한다. 호모 에렉투스는 190만 년 전에 등장하면서 뇌가 커지고 이빨과 턱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요리 가설이 맞는다면 그 무렵에 이미 불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190만 년 전의 불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 논란의 여지 없이 인정되는 불 사용 증거는 40만 년 전 이후에 몰려 있다. 150만 년의 간격이 비어 있다. 이 간격을 어떻게 읽느냐가 지금 논쟁의 본체다.
연대순으로 내려오면 주장의 강도가 뚜렷이 달라진다.
케냐 체소완자, 140만 년 전. 존 가울렛 연구진이 1981년 Nature 294권 125~129쪽에 보고한 불에 구워진 점토 덩어리다. 불에 노출된 것은 맞지만 그 불이 사람이 피운 것인지 근처 나무 그루터기가 탄 것인지 가릴 자료가 없다.
케냐 쿠비 포라, 150만 년 전. 지표 아래 퇴적층에서 가열된 흔적이 보고됐다. 같은 문제가 남아 있다.
남아프리카 스와르트크란스. 찰스 브레인이 보고한 탄 뼈 무더기다. 가열 온도가 높다는 점은 확인됐지만 층의 형성 과정을 두고 이견이 있다.
남아프리카 원더워크 동굴, 약 100만 년 전. 여기서부터 자료의 성격이 달라진다. 프란체스코 베르나 연구진은 동굴 안 아슐리안 층의 퇴적물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채취해 미세형태학과 적외선 분광법으로 분석했다(베르나 외, 2012, PNAS 109권 E1215~E1220쪽). 탄 뼈와 재가 된 식물 잔해가 그 자리에서 만들어졌음이 확인됐다. 동굴 입구에서 30미터 들어간 지점이어서 산불이 그 안까지 옮겨붙기 어렵다는 점도 근거가 됐다. 다만 이 층에 사람이 함께 있었다는 직접 증거는 석기뿐이다.
이스라엘 게셰르 베노트 야코브, 79만 년 전. 나아마 고렌인바르 연구진이 2004년 Science 304권 725~727쪽에 보고했다. 탄 씨앗과 목재와 규석이 함께 나왔고, 탄 규석 조각이 특정 지점에 몰려 있어 화덕 자리로 해석됐다. 탄 목재는 여섯 종이었고 그중 올리브·야생보리·야생포도 세 종은 먹을 수 있는 나무다. 2층 6번 층 2수준에서 나온 석기는 미세유물 7만 9천 670점과 대형 유물 1천 412점이며, 규석 미세유물 가운데 탄 것은 0.76퍼센트에 그친다. 이 낮은 비율 자체가 근거다. 산불이 지나갔다면 훨씬 넓게 탔을 것이고, 한 지점에서만 반복해 불을 피웠기에 이런 분포가 나온다는 해석이다.
40만 년 전을 지나면 자료의 성격이 다시 바뀐다. 흔적이 드문드문 나오는 상태에서 거의 모든 유적에서 나오는 상태로 바뀐다.
이스라엘 케셈 동굴에서는 같은 자리에 반복해 만들어진 화덕이 확인됐고, 연대는 40만 년 전 무렵이다(카르카나스 외, 2007, Journal of Human Evolution 53권 197~212쪽). 같은 지역의 타분 동굴에서는 35만 년 전을 경계로 탄 규석의 비율이 급격히 올라간다(시멜미츠 외, 2014, Journal of Human Evolution 77권 196~203쪽). 스페인 발도카로스 2 유적에서는 24만 5천 년 전 층에서 유기지구화학 분석으로 사람이 관리한 불이 확인됐다(2023, Scientific Reports). 프랑스 테라 아마타의 화덕은 30만 년 전 무렵이다.
빌 뢰브룩스와 파올라 비야는 유럽 자료를 모아 이 경계를 따로 짚었다(뢰브룩스·비야, 2011, PNAS 108권 5209~5214쪽). 유럽에서 불 사용 증거는 50만 년 전 이전에 드물고, 40만 년 전 이후 뚜렷이 잦아진다. 두 사람은 이 변화를 불을 쓰는 단계에서 불을 만드는 단계로의 이행으로 읽었다. 자연 발화한 불을 가져다 유지하는 것과, 필요할 때 스스로 붙이는 것은 고고학 기록에 남는 빈도가 다르다는 논리다. 번개가 치지 않는 계절에도 불이 있으려면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이 해석이 맞는다면 앞선 100만 년의 드문 증거는 가짜가 아니다. 자연 발화를 얻어다 쓴 기록이고, 그래서 드물다. 사람이 언제 불을 ‘썼는가’와 언제 ‘만들었는가’는 다른 질문이며, 요리 가설이 요구하는 쪽은 불을 쓰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구분을 정면으로 문제 삼은 연구가 있다. 데니스 샌드게이스와 해럴드 디블 연구진은 프랑스 남서부의 페슈 드 라제 4와 로크 드 마르살 두 유적을 재발굴하고 층별로 불의 흔적을 세었다. 결과는 예상과 반대였다. 따뜻한 시기의 층에서 불의 흔적이 많이 나오고, 추운 시기의 층에서 적게 나왔다.
추울수록 불이 더 필요하므로 이 분포는 설명을 요구한다. 샌드게이스 연구진은 네안데르탈인이 불을 만들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번개는 따뜻하고 습한 시기에 더 자주 치므로 자연 발화한 불을 얻을 기회도 그때 많았고, 정작 불이 절실한 추운 시기에는 얻을 수 없었다는 논증이다.
뢰브룩스와 비야는 이 추론을 반박했다. 후기 구석기 유적에서도 모든 야영지에 불의 흔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기 수렵채집민이 불을 일상적으로 쓰지 않았다고 말하는 연구자는 없다. 흔적의 유무는 보존 조건과 유적의 성격에도 좌우된다.
아만다 헨리는 세 번째 관점을 제시했다(헨리, 2017, Current Anthropology 58권 S16호). 불을 쓰는 데 비용이 든다는 점을 계산에 넣자고 제안했다. 땔감을 모으고 불을 붙이고 유지하는 데는 상당한 노동이 들어가며, 실험과 민족지 자료가 그 부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불은 얻는 이익이 그 비용을 넘어설 때만 쓰는 도구가 된다. 네안데르탈인이 오늘날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불을 대했다고 전제할 이유가 없고, 흔적이 없는 층은 그때 불을 쓸 이유가 적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세 견해 가운데 어느 쪽도 자료로 판가름나지 않았다. 다만 논쟁의 구조는 분명하다. 고고학 기록의 공백을 능력의 부재로 읽을 것인지, 선택의 결과로 읽을 것인지, 보존의 문제로 읽을 것인지가 쟁점이다. 이 물음은 네안데르탈인에게만 걸리지 않는다. 150만 년의 공백을 어떻게 읽느냐도 같은 구조다.
연대순으로 자료를 놓으면 다음과 같다.
| 연대 | 유적 | 증거의 성격 | 인정 수준 |
|---|---|---|---|
| 150만 년 전 | 쿠비 포라(케냐) | 가열된 퇴적물 | 자연 발화와 구분 어려움 |
| 140만 년 전 | 체소완자(케냐) | 구워진 점토 | 자연 발화와 구분 어려움 |
| 100만 년 전 | 원더워크(남아프리카) | 현장에서 탄 뼈와 식물 재 | 불의 존재는 인정, 주체는 미확정 |
| 79만 년 전 | 게셰르 베노트 야코브(이스라엘) | 탄 규석의 국소 분포 | 화덕으로 널리 인정 |
| 40만 년 전 | 케셈(이스라엘) | 반복 사용된 화덕 | 일상적 사용으로 인정 |
| 35만 년 전 | 타분(이스라엘) | 탄 규석 비율의 급증 | 일상적 사용으로 인정 |
| 30만 년 전 | 테라 아마타(프랑스) | 화덕 구조 | 일상적 사용으로 인정 |
| 24만 5천 년 전 | 발도카로스 2(스페인) | 유기지구화학 분석 | 관리된 불로 인정 |
| 17만 6천 500년 전 | 브뤼니켈(프랑스) | 깊은 동굴 안의 불 흔적 | 운반과 유지 능력의 증거 |
요리 가설이 요구하는 시점은 이 표의 맨 위보다 위에 있다. 호모 에렉투스의 이빨과 턱이 작아지는 190만 년 전이다. 원더워크의 100만 년 전 자료를 인정해도 90만 년이 비고, 게셰르 베노트 야코브를 기준으로 잡으면 110만 년이 빈다.
랭엄 쪽의 답은 두 갈래다. 첫째는 보존 편향을 든다. 야외에서 피운 불의 흔적은 100만 년 넘는 시간을 견디기 어렵고, 동굴처럼 보존 조건이 좋은 자리는 그 시기 아프리카에 흔치 않다. 원더워크가 동굴이기 때문에 남았다는 점 자체가 이 논거를 받친다. 둘째는 해부학을 든다. 불의 직접 증거 대신 몸의 변화를 증거로 삼는 쪽으로, 작아진 이빨과 줄어든 창자가 익힌 음식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대쪽의 답도 두 갈래다. 첫째로 보존 편향 논거가 검증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증거가 없는 이유를 증거가 남지 않아서라고 설명하면 어떤 자료로도 반박할 수 없다. 둘째로 해부학적 변화를 다르게 설명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아이엘로와 휠러의 원래 설명대로 고기와 골수의 섭취가 늘어난 것만으로도 짧은 창자와 큰 뇌를 설명할 수 있고, 석기로 자르고 두드려 부드럽게 만드는 가공만으로도 씹는 부담은 크게 줄어든다.
식단만이 후보인 것도 아니다. 뇌 확대를 설명하는 가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각각 다른 조건을 요구한다.
요리 가설은 이 가운데 가장 검증하기 쉬운 예측을 내놓는다. 특정 시점에 불이 있어야 한다는 예측이다. 검증하기 쉬운 만큼 반증 압력도 크게 받는다. 지금 상황은 예측한 시점에 증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이며, 그 공백을 보존 문제로 설명할 수 있느냐를 두고 다투는 중이다.
불을 언제부터 다뤘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논란의 여지 없이 인정되는 가장 이른 화덕은 79만 년 전 게셰르 베노트 야코브이고, 일상적 사용이 자료 전체에서 확인되는 것은 40만 년 전 이후다. 그 이전으로 올라가면 원더워크의 100만 년 전 자료가 있지만 불을 피운 주체가 확정되지 않았고, 140만~150만 년 전 케냐 자료들은 자연 발화와 구분되지 않는다.
이 불확실성은 불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요리 가설은 19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에게 불이 있었다고 요구하는데 그 시점의 증거가 없고, 비싼 조직 가설은 고기 섭취만으로 같은 해부학적 변화를 설명한다. 두 설명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몸이 왜 지금 형태가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빨이 작아진 것이 불 때문인가 도구 때문인가, 창자가 짧아진 것이 조리 때문인가 육식 때문인가가 여기에 걸려 있다.
같은 구조의 물음이 네안데르탈인에게도 반복된다. 페슈 드 라제 4와 로크 드 마르살에서 추운 시기의 층에 불의 흔적이 적다는 관찰을 두고, 불을 만들 줄 몰랐다는 해석과 보존의 문제라는 해석과 쓸 이유가 적었다는 해석이 맞선다. 고고학 기록의 공백을 무엇으로 읽을 것이냐는 물음이 두 논쟁에 똑같이 걸려 있다.
앞으로 확인될 지점은 분석 기법 쪽에 있다. 미세형태학과 적외선 분광법이 표준으로 자리잡으면서 오래된 유적의 퇴적물을 다시 분석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고, 발도카로스 2의 유기지구화학 분석처럼 새 기법도 들어오고 있다. 100만 년을 넘는 자료에서 그 자리에서 탔다는 사실과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주는 유적이 나오면 논쟁의 무게가 옮겨 간다. 반대로 오래된 주장들이 재분석에서 무너지면 요리 가설은 해부학적 논거만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