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obhan.me

창제된 문자의 존폐를 가른 조건

파스파에서 아들람까지, 살아남은 문자와 사라진 문자의 차이

설계가 정교한 문자가 먼저 죽었다

데저렛 문자는 1854년 미국 유타에서 공표되었다. 영어의 소리와 철자가 어긋나는 문제를 없애려고 만든 문자여서 음소와 글자가 하나씩 대응한다. 뒤를 받친 조직도 든든했다.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대학 평의회를 통해 개발했고, 교회 지도자 브리검 영이 직접 밀었다. 1854년부터 1869년까지 책과 신문과 거리 표지판과 우편에 쓰였다. 그리고 15년 만에 끊겼다.

바이 음절문자는 1833년 무렵 라이베리아의 한 마을에서 나왔다. 만든 사람 모몰루 두왈루 부켈레는 문자를 읽을 줄 몰랐고, 꿈에 나타난 낯선 사람이 땅에 기호를 그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국가 지원도 인쇄소도 없었다. 그 문자는 190년이 지난 지금도 손편지와 출판물에 쓰이며 유니코드에 들어가 있다.

이 두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문자의 존폐가 설계의 정교함이나 후원자의 힘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1편에서 열한 가지 창제 문자를 살펴봤다. 절반은 살아남았고 절반은 사라지거나 끊겼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는지 따져 보면 되풀이되는 조건이 나온다.

문자의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문자로 적던 언어가 함께 사라진 경우다. 고트어와 탕구트어가 여기 든다. 언어 사용자가 없으면 문자를 쓸 사람도 없다. 다른 하나는 언어는 멀쩡히 살아 있는데 문자만 다른 것으로 갈아탄 경우다. 소말리어가 그렇다. 뒤쪽이 더 흔하고, 그 결정은 대개 정치가 내린다.

파스파 문자는 황제의 칙령을 받고도 100년을 못 갔다

1260년 쿠빌라이 칸은 티베트 승려 팍파(1235~1280)에게 국사 칭호를 주면서 몽골 제국 전역에서 쓸 새 문자를 만들라고 명했다. 기존의 위구르계 몽골 문자를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위구르에서 빌려 온 문자여서 몽골 고유의 창작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 문자가 몽골어의 소리를 제대로 담지 못하고 한어처럼 음운 구조가 전혀 다른 언어에는 더욱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9년 뒤인 1269년, 지원 6년 2월 13일에 세조가 칙령을 내려 모든 공문서에 새 문자를 쓰도록 했다. 기존 지역 문자와 병기하는 방식이었다. 문자는 38자이며 티베트 문자를 확장해 만들었다. 티베트 문자는 인도 브라흐미 계통인데, 파스파 문자는 그 계통에서 유일하게 위에서 아래로 세로쓰기를 한다.

glyph
[k]
glyph
[kh]
glyph
[g]
glyph
[t]

파스파 문자 네 글자. 글자마다 폭이 일정하고 각이 져서 네모 글자라 불린다.

쿠빌라이는 학교를 세워 이 문자를 가르치게 했고, 옛 몽골 문자 사용을 금지하는 칙령을 여러 차례 내렸다. 효과가 없었다. 몽골과 한족 관리들은 새 문자를 마지못해 제한적으로만 썼고, 민간에서는 더 쓰지 않았다. 실질적인 행정은 계속 한자로 이뤄졌으며 파스파 문자는 인장, 동전, 기념 명문 같은 의례적 자리로 밀렸다.

이 결과를 설계 실패로 돌리기는 어렵다. 파스파 문자는 몽골어, 한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 위구르어, 페르시아어를 한 체계로 적도록 만들어졌고, 원대 한어의 음운을 재구성하는 데 지금도 쓰이는 자료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한자는 이미 완성된 체계였고, 그것을 쓰는 지식인 계층은 새 문자를 배울 이유가 없었다. 새 문자를 익히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집단에게 칙령으로 문자를 내린 셈이었다.

1368년 원이 무너지자 한족 지역에서는 곧바로 버려졌고 몽골인들은 위구르계 문자로 돌아갔다. 몽골어로 된 마지막 기록은 1352년경이며, 남은 자료는 명문 수십 점과 소수의 문헌과 기물뿐이다. 지금은 티베트에서 인장이나 사찰 명문의 장식으로 가끔 쓰인다.

왕조와 함께 사라진 문자들

서하 문자는 1036년에 나왔다. 서하는 탕구트족이 지금의 중국 서북부에 세운 나라이고, 『송사』에 따르면 경종이 고위 관리 야리 인영에게 명해 설계하게 했다. 만드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고 곧바로 실사용에 들어갔다. 국립 학교를 세워 가르쳤으며 공문서에 썼고 외교 문서는 두 언어를 함께 적었다.

glyph
서하 문자의 자칭 첫 글자
glyph
자칭 둘째 글자
glyph
획이 적은 편에 드는 글자

서하 문자 세 자. 한자와 획의 종류가 같지만 글자를 만드는 방법이 다르다. 2004년 집계로 이체자를 빼고 5863자가 확인된다.

거란 문자는 그보다 앞선다. 요 태조 야율아보기의 명으로 야율돌려불과 야율노불고가 만들어 920년 초에 도입한 것이 대자이고, 4년에서 5년 뒤에 야율질랄이 위구르 문자에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 소자다. 소자는 2020년 유니코드 13.0에 470자가 들어갔고 2024년 16.0에서 한 자가 더해져 471자가 되었다. 글자마다 이름이 없고 코드값에서 기계적으로 만든 이름을 쓴다.

glyph
거란 소자 자소
glyph
거란 소자 자소
glyph
거란 소자 자소
glyph
거란 소자 자소

거란 소자 네 자. 음가와 뜻이 확정되지 않아 유니코드도 글자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두 문자 모두 왕조가 무너지면서 함께 사라졌다. 탕구트어는 명대 어느 시점에 소멸했고 문헌도 잊혔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러시아의 코즐로프 탐험대가 내몽골의 폐허 도시 카라호토 성벽 밖 탑 속에 숨겨져 있던 문헌을 발굴하면서 다시 알려졌고,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아우렐 스타인이 추가로 수습했다.

거란 문자는 해독이 더 어렵다. 서하 문자에는 한자 대역 사전이 남아 있는데 거란 문자에는 사전이 없기 때문이다. 거란 대자는 아직 유니코드에 들어가지 못했다. 2014년 예비 제안이 나왔으나 어떤 글자를 수록할지와 비슷한 글자를 하나로 볼지를 정하지 못해 진척이 없다.

여기서 하나 짚을 것이 있다. 서하 문자와 거란 문자는 왕조의 문서 행정에 깊이 박혀 있었다. 국립 학교, 공문서, 과거 시험, 불경 번역까지 제도가 받쳤다. 그 제도가 사라지자 문자를 쓸 자리가 통째로 없어졌다. 제도가 강하게 받친 문자일수록 제도의 소멸에 취약하다.

바뭄 문자를 끊은 것은 식민 행정이었다

카메룬 바뭄 왕국의 이브라힘 은조야는 1896년부터 1910년까지 자기 백성의 말을 적을 문자를 만들었다. 그림문자에서 출발해 단어 기호를 거쳐 80자 음절문자에 이르렀다. 보급은 왕의 권한으로 밀어붙였다. 학교에서 가르치게 했고 행정 전 단계에 쓰도록 했으며, 왕조사와 법률과 관습과 약 처방까지 기록하게 했다. 궁정 문서고에 남은 원본이 8000점을 넘는다. 1918년에는 인쇄용 구리 활자를 주조했다.

glyph
[a]
glyph
[ka]
glyph
[u]
glyph
[ku]

바뭄 문자 네 글자. 14년에 걸쳐 그림문자에서 음절문자로 바뀌었다.

성공이 화근이 되었다. 식민지에서 토착 문자가 퍼진다는 것은 식민 권력이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1931년 프랑스 당국은 바뭄족의 세력을 꺾으려고 은조야를 야운데로 유배 보냈고, 학교에서 이 문자를 쓰지 못하게 금지했다. 왕이 사라지자 문자는 1931년경 사용이 끊기고 대다수 주민에게 잊혔다. 은조야는 1933년 유배지에서 죽었다.

문자를 밀어 올린 힘과 문자를 끊은 힘이 같은 지점에 있었다. 왕 한 사람의 권한으로 퍼진 문자는 그 왕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멈출 수 있었다. 문자가 마을과 시장과 가정의 일상 필요에 뿌리내렸다면 당국이 학교에서 금지해도 그 정도로 끊기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다만 기억은 남았다. 소규모 사용이 이어졌고 2007년에 첫 조직적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지역 학생들에게 다시 가르치며, 2023년에는 바뭄어와 바뭄 문자로 된 첫 시집이 나왔다. 현 술탄은 미국 세인트존스대학에서 서아프리카 문자 연구자 콘라트 투흐셰러의 지도를 받아 조부의 문자를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다.

소말리어는 살아남고 오스마냐만 교체되었다

오스만 유수프 케나디드가 1920년에서 1922년 사이에 만든 오스마냐 문자는 소말리어를 적기 위한 것이었다. 30자와 숫자 10개로 구성되며 아랍 문자와도 라틴 문자와도 닮지 않게 설계되었다. 아랍 문자는 이슬람과 외래 영향에, 라틴 문자는 식민 지배에 묶여 있다고 본 판단이 그 설계에 들어가 있다.

glyph
[f]
glyph
[a]
glyph
[r]
glyph
[s]

오스마냐 문자 네 글자. 소말리어의 소리에 맞춰 새로 고안되었다.

보급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문헌이 빠르게 쌓였고 술탄국 학교에 도입되었다. 그런데도 확산에 한계가 있었다. 이미 수백 년 쓰인 아랍 문자가 버티고 있었고, 여러 학자가 개발한 라틴 표기가 새로 올라왔다.

1972년 10월에 결말이 났다. 시아드 바레 대통령이 라틴 문자를 소말리어 공식 표기로 지정했다. 채택 이유로 제시된 것은 셋이다. 체계가 간단하다는 것, 소말리어의 모든 소리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라틴 문자용 기계와 타자기가 이미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대규모 문해 운동이 벌어졌고 오스마냐 사용은 급격히 줄었다. 1970년대까지는 개인 편지와 장부에 쓰는 사람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세 번째 이유를 눈여겨볼 만하다. 문자의 언어학적 적합성 외에 타자기 보급이라는 기계 사정도 결정에 들어갔다. 20세기 문자 선택에서 이 요인은 되풀이해 나타난다. 아들람이 유니코드와 자판과 글꼴을 확보하는 데 그토록 공을 들인 이유도 같은 자리에 있다.

여기서 갈리는 것이 언어와 문자의 운명이다. 소말리어 사용자는 지금도 수천만 명이고 언어는 번성한다. 사라진 것은 문자뿐이다.

체로키는 반대 방향으로 갈라졌다

체로키에서는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문자는 살아 있고 언어가 위태롭다.

glyph
차 [tsa]
glyph
라 [la]
glyph
기 [gi]
glyph
아 [a]
glyph
야 [ya]

체로키 음절문자 다섯 자. 문자는 유니코드에 등재되어 교육과정의 중심에 있다.

세쿼이아의 음절문자는 유니코드에 들어가 있고, 오클라호마의 체로키 네이션과 노스캐롤라이나의 동부 체로키 밴드가 운영하는 교육 과정의 중심에 있다. 반면 체로키어를 유창하게 쓰는 사람은 2100명 정도로 추산되며 거의 모두 고령이다. 몰입 학교와 대학 강좌와 디지털 도구를 동원한 되살리기 사업이 진행 중이다.

이 갈림은 1830년 인디언 이주법과 그 뒤의 강제 이동에서 비롯한다. 체로키인들은 집과 재산을 잃고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갔다. 그 뒤 동화 정책이 언어 사용을 눌렀는데, 문자는 기록물과 출판물의 형태로 남았다. 말하는 사람이 줄어도 적힌 것은 남는다. 문자가 언어보다 오래 버티는 경우가 여기 해당한다.

살아남은 문자들의 공통 조건

바이, 은코, 아들람은 국가의 후원 없이 퍼졌고 지금도 쓰인다. 세 문자의 조건을 겹쳐 보면 같은 항목이 나온다.

첫째, 대체재가 그 언어에 잘 맞지 않았다. 만딩어와 풀라어는 오래도록 아랍 문자를 변형한 아자미로 적혔는데, 아자미는 이들 언어의 성조를 제대로 적지 못했다. 바리 형제가 문자를 만들기로 한 계기도 아버지에게 오는 편지가 아랍 문자로 적혀 있어 읽기 어려웠다는 데 있었다. 반면 데저렛이 대체하려 한 라틴 문자는 영어를 적는 데 불편했을지언정 이미 사회 전체가 쓰고 있었다.

둘째, 쓰는 사람이 곧 필요를 가진 사람이었다. 바이 문자는 편지와 장부와 목공 도면과 일기에 쓰였다. 은코는 칸테 본인이 1949년부터 1987년 사망까지 183편이 넘는 저작을 썼고, 문해 운동이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서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졌다. 아들람은 형제가 가족과 마을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데서 시작해 여러 나라의 학습 센터로 번졌다.

셋째, 정체성의 표지로 작동했다. 은코는 아프리카에 고유 문자 전통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만들어졌고, 아들람의 이름 자체가 민족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는 문자라는 뜻이다. 문자를 쓰는 행위에 실용을 넘어선 이유가 붙으면 불편을 감수하는 힘이 생긴다.

glyph
[a]
glyph
[d]
glyph
[l]
glyph
[m]

아들람 네 글자. 1989년에 두 소년이 만든 문자가 2016년 유니코드에 들어갔다.

넷째, 디지털 기반을 확보했다. 은코는 1950년대에 동유럽에서 전용 타자기를 들여왔고 2024년 6월 27일 구글 번역에 문어 표준이 추가되었다. 바이는 유니코드 등재로 되살아났다. 아들람은 2016년 유니코드 9.0 등재, 2018년 구글 글꼴과 안드로이드 자판, 2023년 마이크로소프트 365 통합을 차례로 확보했다. 반대로 바뭄 문자는 1918년에 활자를 주조했으나 1931년에 끊겼고, 100년 가까이 지나서야 복원이 시작되었다.

만주 문자는 제국의 공식 문자였는데도 밀렸다

청은 중국 전역을 260년 넘게 지배했다. 만주 문자는 그 제국의 공식 문자였고 황제의 조칙과 상주문과 교육과 번역에 쓰였다. 국가 권력의 크기로만 보면 이 목록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이었다.

과정을 보면 사정이 다르다. 1599년 누르하치가 만들게 한 구만주문은 점과 원이 없어 구별되지 않는 음절 글자가 많았다. 1632년 홍타이지가 학자 다하이에게 개량을 명했고, 다하이는 글자 오른쪽에 점과 원을 찍어 그 문제를 풀었으며 한어 차용어를 적을 음절도 보탰다. 다하이는 개량을 마친 해에 죽었다. 이것이 신만주문이다.

glyph
[a]
glyph
[e]
glyph
[na]
glyph
[ma]

몽골 문자 네 글자. 만주 문자는 이 문자를 고쳐 만들었고 별도 유니코드 블록 없이 몽골 문자 블록을 함께 쓴다.

문서는 많이 남았다. 중국국가도서관이 소장한 만주어 서적만 1만 6600점을 넘는다. 그런데 지배층 자신이 한어를 쓰게 되면서 문자의 쓰임이 줄었다. 건륭제가 만주어 능력 유지를 여러 차례 지시한 것 자체가 이미 쇠퇴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증거다.

지금 만주어를 모어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장의 시버족이 쓰는 시버어가 만주어에 가장 가까운 언어로 남아 만주 문자를 변형한 문자를 쓴다. 2025년 9월 중국의 만주어 기록물 디지털 관리가 시작되었고 중앙민족대학이 만주어 강좌를 운영한다. 복원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일상 사용이 끝났다는 뜻이다.

이 사례가 목록에서 갖는 뜻은 분명하다. 국가 권력의 크기와 문자의 생존은 비례하지 않는다. 청은 원보다 훨씬 오래, 훨씬 넓게 지배했으나 만주 문자의 결말은 파스파 문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식민 행정의 문해 정책이 문자를 갈아치웠다

멘데 키카쿠이는 1917년경 시에라리온에서 만들어져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널리 쓰였다. 편지와 기록 관리, 법정 문서, 기독교와 이슬람 문헌 작성에 쓰였고 쿠란을 옮겨 적는 데도 쓰였다.

1940년대에 상황이 바뀌었다. 영국이 보에 보호령 문해국을 세우고 라틴 문자 기반 표기를 보급하면서 키카쿠이가 밀려났다. 금지가 아닌 대체였다. 학교와 행정이 라틴 표기를 쓰면 그 표기를 익힌 세대가 다음 세대에 그것을 물려준다.

같은 구조가 소말리아에서 30년 뒤에 반복되었다. 1972년 시아드 바레 정권은 라틴 표기를 공식 문자로 정하고 대규모 문해 운동을 벌였다. 오스마냐를 금지하지는 않았고, 라틴 표기를 쓸 자리를 국가가 남김없이 채웠다. 바뭄 문자처럼 직접 금지된 사례와 결과는 같았다.

여기서 앞 절의 조건 하나가 뒤집힌다. 국가가 문자를 밀면 빠르게 퍼지지만, 같은 국가가 다른 문자를 밀면 그만큼 빠르게 사라진다. 국가의 지원은 양날의 조건이다.

폴라드 문자는 국가 밖에서 살아남았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다른 길을 간 사례가 있다. 1904년 구이저우성에서 새뮤얼 폴라드와 왕밍지를 비롯한 묘족 협력자들이 만든 폴라드 문자다. 이 문자는 지금도 아흐마오어, 리포어, 쓰촨 묘어, 나수어를 적는 데 쓰이며 유니코드 U+16F00부터 U+16F9F 구간에 들어가 있다.

차이를 만든 조건이 눈에 띈다. 폴라드 문자는 국가 행정에 들어간 적이 없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경과 찬송가를 읽는 도구로 자리 잡았고, 그 공동체가 세대를 넘어 유지되었다.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았으므로 국가의 정책 변경에 흔들리지도 않았다.

바이, 은코, 아들람, 폴라드 문자의 공통점이 여기 있다. 넷 모두 국가가 만들지 않았고 국가가 없애지도 못했다.

21세기의 관문은 유니코드다

20세기에 타자기 보급이 문자의 운명에 개입했다면 지금은 문자 부호화 표준이 그 자리에 있다. 유니코드에 등재되지 않은 문자는 컴퓨터와 휴대전화에서 입력할 수 없고, 입력할 수 없으면 젊은 세대가 쓰지 않는다.

유니코드 등재 세계의 문자를 컴퓨터가 다룰 수 있도록 글자마다 고유 번호를 부여하는 국제 표준이다. 등재되려면 어떤 글자를 수록할지, 비슷하게 생긴 글자를 하나로 볼지 따로 볼지, 글자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가 정리되어야 한다. 살아 있는 문자는 사용자 공동체가 이 작업을 맡을 수 있으나, 죽은 문자는 연구자들이 남은 자료만으로 판단해야 하므로 훨씬 오래 걸린다.

등재 여부가 갈리는 모습을 보면 문자의 상태가 드러난다. 거란 소자는 2020년 유니코드 13.0에 470자가 들어갔는데 글자마다 이름이 없다. 음가나 뜻을 이름으로 붙일 근거가 없어 코드값에서 기계적으로 이름을 만들었다. 거란 대자는 2014년 예비 제안이 나왔으나 수록 범위와 글자 통합 문제가 풀리지 않아 지금도 등재되지 않았다.

여진 문자는 더 극단적이다. 대자는 2024년에 제안이 제출되어 심사가 후반부까지 진행되었고, 소자는 남은 자료가 패자 세 점의 여섯 글자뿐이어서 2025년 6월에 별도 블록 대신 거란 소자 블록 안에 넣기로 결정되었다. 문자 하나가 표준에서 차지하는 자리의 크기가 그 문자가 남긴 자료의 양을 그대로 반영한다.

반대편에는 아들람이 있다. 2014년 유니코드 기술위원회 논의, 2016년 유니코드 9.0 등재, 2018년 구글 글꼴과 안드로이드 자판, 2023년 5월 마이크로소프트 365 통합이 12년 사이에 이뤄졌다. 바리 형제가 미국으로 옮긴 뒤 캘리그래피 학회에서 유니코드 편집자를 만난 우연이 그 출발점이었다.

표준 밖에 남은 문자도 있다. 1867년 알렉산더 멜빌 벨이 만든 가시 언어는 표준 유니코드에 없고 ConScript Unicode Registry라는 비공식 등록처가 사용자 영역의 한 구간을 배정했을 뿐이다. 사용자 영역은 표준이 비워 둔 구간이라 글꼴을 따로 지정하지 않으면 다른 글자가 나온다.

조건들을 한 표에 놓으면

문자국가 지원대체재 상황기록 기반결과
파스파칙령, 학교한자가 이미 있었다인장·동전에 한정100년 만에 폐기
서하·거란국립 학교, 공문서한자와 병용왕조 문서 체계왕조와 함께 소멸
데저렛교회 조직라틴 문자가 이미 있었다활자·신문15년 만에 끊김
바뭄왕의 명령문자가 없었다구리 활자왕 유배로 끊김
오스마냐술탄국 학교아랍 문자, 라틴 표기타자기 부족1972년 정책 전환
멘데 키카쿠이없음아랍 문자손글씨 위주라틴 표기에 밀림
폴라드없음문자가 없었다교회 인쇄물, 유니코드사용 중
바이없음아랍 문자유니코드사용 중
은코없음아자미가 성조를 못 적음타자기, 유니코드, 번역기확대 중
아들람없음아자미가 발음을 못 적음유니코드, 글꼴, 자판확대 중
한글칙령한문은 계층 제한활자, 언해서사용 중

표를 세로로 읽으면 국가 지원 항목과 결과 항목 사이에 상관이 잡히지 않는다. 대체재 상황 항목과는 상관이 잡힌다. 기존 문자가 이미 그 사회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경우는 예외 없이 실패했고, 기존 문자가 없거나 그 언어를 제대로 적지 못한 경우는 살아남은 쪽이 많다.

한글을 이 기준에 올려놓으면

한글은 국가가 만들어 반포한 문자다. 파스파, 서하, 거란, 데저렛, 오스마냐, 바뭄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런데 이 부류에서 살아남은 것은 한글뿐이다.

차이를 만든 조건이 위의 목록과 겹친다. 한문은 조선에서 완성된 문자 체계였지만 그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한문 교육을 받지 못한 계층에게 대체재가 없었다는 점에서, 한글은 파스파보다 아들람 쪽에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 파스파 문자는 이미 한자를 능숙하게 쓰는 관리들에게 내려간 반면, 한글은 문자를 갖지 못한 쪽에 열렸다.

다만 이 설명을 성공담으로 끌고 가면 사실과 어긋난다. 조선 시대 내내 공식 문서는 한문으로 작성되었고, 한글이 공용 문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19세기 말 이후다. 1894년 고종의 칙령이 공문서에 국문을 기본으로 삼는다고 정한 뒤에도 실제 전환에는 수십 년이 걸렸다. 한글은 400년 넘게 비주류 문자로 버텼다. 그 400년 동안 한글을 붙들어 둔 쪽은 국가가 아니었다. 편지와 소설과 가사와 종교 서적을 쓰고 읽은 사람들이었다.

바뭄 문자와 비교하면 이 대목이 뚜렷해진다. 바뭄 문자는 왕의 권한으로만 유지되었기에 왕을 없애자 끊겼다. 한글은 국가가 뒤로 물러난 뒤에도 쓰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결론 — 문자를 살리는 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창제된 문자 열두 가지의 존폐를 훑으면 설계 품질은 예측력이 약한 변수다. 파스파 문자는 여섯 언어를 한 체계로 적도록 만들어졌고 황제의 칙령을 받았으나 100년을 못 갔다. 데저렛은 음소 대응이 정확했고 교회 조직이 밀었으나 15년 만에 끊겼다. 바이 문자는 꿈에서 나왔다는 설계인데 190년째 쓰이고, 아들람은 열 살과 열네 살 형제가 6개월 만에 만든 문자인데 유니코드와 마이크로소프트 365에 들어갔다.

되풀이되는 조건은 네 가지다. 기존 문자가 그 언어에 잘 맞지 않아 대체재가 실질적으로 없을 것, 쓰는 사람이 곧 그 문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일 것, 문자를 쓰는 행위에 정체성의 이유가 붙을 것, 그리고 활자든 타자기든 유니코드든 당대의 기록 기반을 확보할 것, 이 넷이다. 반대로 제도가 강하게 받친 문자는 그 제도가 무너질 때 함께 무너졌다. 서하와 거란 문자는 왕조와 함께, 바뭄 문자는 왕의 유배와 함께 끊겼다.

문자와 언어의 운명이 따로 움직인다는 점도 확인된다. 소말리어는 번성하는데 오스마냐는 죽었고, 체로키 문자는 유니코드와 학교에 살아 있는데 체로키어 유창 화자는 2100명 규모로 줄었다. 문자가 남았다고 언어가 안전하지 않으며, 언어가 살아 있다고 문자가 보장되지 않는다.

지금 진행 중인 사례들은 판단을 미뤄 둘 필요가 있다. 은코와 아들람은 사용자가 늘고 있으나 두 문자 모두 디지털 환경의 처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아들람이 언어모델 토크나이저에서 라틴 문자 대비 20.9배의 비용을 치른다는 2026년 보고는 그 위험을 구체적인 수치로 보여 준다. 20세기에 타자기 보급이 소말리아의 문자 선택을 좌우했듯이, 21세기에는 표준 등재와 글꼴과 자판과 토크나이저가 같은 자리에 놓인다. 어느 문자가 다음 세대에 남을지를 정하는 조건은 이미 언어학 밖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