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낱말 바이블(Bible)의 뿌리는 레바논 해안의 한 항구 이름이다. 베이루트 북쪽 40킬로미터 지점, 지금은 아랍어로 즈베일(Jbeil)이라 부르는 도시다. 그리스인은 이 도시를 비블로스(Βύβλος)라 불렀고, 파피루스를 뜻하는 그리스어 낱말도 같은 형태였다. 파피루스로 만든 두루마리가 비블리온(βιβλίον)이 되고, 그 복수형이 라틴어를 거쳐 성경의 이름으로 굳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스스로를 비블로스라 부른 적이 없다. 주민들이 쓴 이름은 게발(Gebal), 더 이른 형태로는 구블라(Gubla)였다. 이집트 서기는 케벤(keben) 또는 크프니(Kpni)라 적었고,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서기는 구블라라 적었으며, 십자군은 지벨레(Gibelet)라 불렀다. 오늘날 세계에 알려진 이름은 이 도시와 거래한 쪽이 붙인 것이고, 그 이름이 다시 서양 언어에서 책과 성경을 뜻하는 낱말이 되었다.
이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도시의 신석기 마을부터 십자군 성채까지 이어지는 7천 년 역사는 도시가 자기에 대해 남긴 문서로 복원된 것이 아니다. 이집트 왕실의 연대기와 원정 기록, 마리와 에블라의 점토판, 아시리아 왕들의 조공 장부, 그리스 지리학자의 한 문단이 재료다. 이 글의 논지를 먼저 적는다. 비블로스의 역사는 남이 자기 목적으로 남긴 기록의 합이며, 널리 통용되는 두 가지 설명, 곧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사람이 살아온 도시'와 '알파벳의 발상지'는 이 도시의 성취를 요약한 말이라기보다 자료가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사정에서 나온 말이다.
이름의 계보를 먼저 정리해야 뒤의 논의가 선다. 가나안어 계열의 게발·구블라가 가장 이른 형태이고, 아랍어 즈베일은 여기서 직접 내려온 이름이다. 이집트 상형문자 기록에서는 제1중간기(기원전 2181~2055년)에 크브니(kbnj), 중왕국기(기원전 2055~1650년)에 크븐(kbn)으로 적혔다. 아카드어 설형문자 기록의 구블라는 구약의 표기와 같은 계열이다. 그리스어 비블로스와 십자군의 지벨레는 각각 지중해 북안과 유럽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리스어 이름과 파피루스라는 낱말의 관계는 오랫동안 한 방향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리스인이 이 항구를 거쳐 이집트산 파피루스를 들여왔으므로 물건 이름과 도시 이름이 같아졌고, 도시 이름 비블로스는 가나안어 게발이 그리스어 음운에 맞춰 변형된 형태라는 설명이다. 반대 방향의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로베르트 베익스의 『그리스어 어원사전』(2010)은 βύβλος 항목에서 낱말이 먼저 있었고 도시가 그 낱말에서 이름을 얻었을 수 있으며, 그 경우 도시 이름에 붙은 셈어 어원 설명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 된다고 적는다. 이 낱말 자체가 그리스어 이전 계통일 가능성도 함께 적혀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이 글에서 결론이 나지 않는다. 정해진 것은 논쟁의 구조다. 도시 이름의 유래를 따지는 자료가 그리스어 어휘사와 이집트 무역 기록이고, 이 도시가 자기 문자로 자기 이름을 설명한 문서는 없다. 아래 견본은 페니키아 문자로 적은 이 도시 이름의 세 글자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GBL이며, 모음은 적지 않는다.
페니키아 문자로 적은 도시 이름 GBL(게발). 독자 기기에 페니키아 문자 글꼴이 없어도 보이도록 글리프 윤곽선을 도형으로 심었다. 각 칸 아래에 적은 것은 유니코드에 등재된 글자 이름과 그 글자가 나타내는 자음이다.
이 도시의 역사를 논하기 전에 그 역사가 어떤 절차로 만들어졌는지 알아야 한다. 유적은 세 차례의 조사를 거쳤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이 1860년부터 1861년까지 레바논 해안을 조사하고 1864년에 『페니키아 조사기』(Mission de Phénicie)를 냈다. 이어 피에르 몽테가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모리스 뒤낭이 1925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했다. 한 사람이 50년을 파낸 유적이다.
문제는 파낸 방식이다. 뒤낭은 유적을 20센티미터 두께의 인공 수평층으로 나눠 차례로 걷어내는 방식을 썼다. 땅속에서 기울어져 있거나 구덩이로 파여 있던 실제 퇴적층의 경계를 무시하고 잘랐다. 카린 소와다는 몽테와 뒤낭의 발굴 방법 때문에 출토품 상당수가 자세한 해석을 거부한다고 적으면서, 3천년기 고고학의 최선의 복원은 여전히 문타하 사기에가 1983년에 보고서와 야장을 맞춰 층서를 재조립한 작업이라고 평가한다. 어떤 유물은 옛 도면과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규모도 짚어둘 만하다. 하난 차라프는 고대 비블로스가 5헥타르, 곧 축구장 일곱 개 정도의 면적이었다고 적는다. 오늘날의 즈베일시 면적은 4.16제곱킬로미터다. 이 작은 언덕이 이집트와 시리아의 큰 왕국들과 나란히 문서에 오른 까닭은 위치 하나였다. 레바논 산맥의 삼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항구가 있었다.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한 시점은 기원전 8800년에서 7000년 사이로 본다. 이 단계는 토기가 아직 없던 신석기(선토기 신석기B) 층에 해당하고, 석회를 바른 바닥과 특정한 방식으로 떼어낸 돌날 제작 기술이 지표가 된다. 끊기지 않고 사람이 산 시점은 기원전 5000년경부터로 잡는다. 뒤낭이 다섯 시기로 나눈 선사 층은 이후 요세프 가르핀켈이 예리코(텔 에스술탄)의 층과 맞춰 다시 조정했다.
여기서 말이 조심스러워야 한다. 초기 청동기 비블로스를 다룬 미셸 더 브레이제는 기원전 3100/3000년부터 2000년까지의 비블로스가 '도시'라는 모델에 온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고 적는다. 분명한 것은 이곳이 아무 데나가 아니었다는 점이고, 그 성격을 결정한 것은 성소였다고 적는다. 마을이 언제 도시가 되었는지는 '도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이 문제는 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표현을 따질 때 다시 나온다.
이집트와의 연결은 기원전 4천년기 중후반에 이미 확인된다. 소와다의 정리에 따르면 이집트 초기 무덤에 은과 청금석 같은 외래품이 나타나고, 기원전 3320년경 아비도스의 우제이(U-j) 무덤에서는 수백 점의 수입 항아리와 레바논 삼나무로 만든 상자가 나왔다. 이집트 제1왕조(기원전 3100~2870년) 무덤에서는 비블로스에서 가장 잘 알려진 형태의 길고 날씬한 항아리가 나온다. 제1왕조에서 제6왕조까지, 쿠푸에서 페피 2세에 이르는 왕들의 이름이 새겨진 이집트 석제 용기가 비블로스에서 다량 출토되었다.
비블로스 서술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문장은 이집트 제4왕조 스네프루(기원전 26세기) 치세에 삼나무를 실은 배 40척이 들어왔다는 기록이다. 근거는 팔레르모 석이다. 이집트 구왕국 왕실 연대기를 새긴 석비의 조각 일곱 개 가운데 가장 크고 잘 남은 것으로, 제5왕조 때 만들어졌으며 지금 이탈리아 팔레르모의 안토니노 살리나스 고고학박물관에 있다. 왕마다 재위 연차별로 그해의 주요 사건을 한 줄씩 적은 문서다.
해당 항목은 삼나무 목재를 실은 배 40척을 들여왔다고 적는다. 같은 왕의 기록에는 100큐빗 길이의 메루 목재 배를 만든 일, 왕의 16인승 바지선 60척을 만든 일, 누비아 원정에서 포로 7천 명과 가축 20만 마리를 끌고 온 일이 나란히 적혀 있다.
이 항목에 비블로스라는 지명은 없다. 레바논이라는 지명도 없다. 삼나무라는 물품 이름만 있다. 소와다는 이 시기 이집트 문헌 일반의 성격을 그렇게 정리한다. 문헌은 외래 물품을 언급하면서 산지를 밝히지 않는다. 40척의 배가 비블로스에서 왔다는 서술은 사료에 고고학 자료를 겹쳐 얻은 추론이다. 추론의 근거는 충분하다. 같은 시기 비블로스에서 이집트 왕들의 이름이 새긴 그릇이 다량 나오고, 이집트 무덤에서 비블로스 계열 항아리와 레바논 삼나무가 나온다. 그러나 근거가 충분한 것과 사료에 적혀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같은 왕의 같은 기록에서 판독 자체가 흔들리는 자리도 있다. 포이 스칼프는 2009년 논문에서 스네프루의 일곱 번째 계수 항목 첫 칸을 재검토했다. 이 자리를 하인리히 셰퍼는 번역하지 않고 남겼고, 야로미르 말레크는 사람이 딸린 영지 35곳과 소 농장 122곳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옮겼으며, 토비 윌킨슨이 그 판독을 받아들였다. 스칼프는 사람의 영지라는 단위가 다른 자료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과 같은 석비의 다른 자리에 쓰인 글자 형태가 다르다는 점을 들어 대영지 35곳을 만들고 황소 122마리를 받았다는 쪽으로 읽자고 제안했다. 한 문장의 뜻이 백 년 넘게 정해지지 않았다.
비블로스라는 이름이 분명하게 적히고 항해까지 서술된 이집트 기록은 더 늦게 나온다. 소와다가 소개하는 제6왕조 관리 이니(Iny)의 전기 명문은 페피 1세, 메렌레, 페피 2세 세 왕의 치세에 걸쳐 여러 차례 비블로스와 레반트로 왕실 항해를 지휘한 경력을 적고, 돌아오는 배에 실린 청금석·은·주석 또는 납·기름·사람과 '비블로스 배'를 열거한다. 아스완 근처 쿱베트 엘하와의 후이(Khui) 무덤 명문도 관리들이 케벤에 여러 번 다녀온 일을 언급한다. 사후레 왕의 피라미드 참배로에는 이집트인과 외국인을 태운 배가 돌아오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이 오른 3천년기 문서는 이집트 것만이 아니다. 소와다가 정리하는 바에 따르면, 북시리아의 에블라에서 나온 기원전 2330년에서 2300년경의 설형문자 점토판에는 이집트에서 온 사절, 비블로스에서 온 사절, 내륙 시리아에서 고용한 중개인의 역할이 각각 적혀 있다. 에블라 문서에서 이집트와 비블로스는 두구라수와 둘루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청금석과 주석과 은 같은 물품을 놓고 에블라와 이집트 사이를 중개한 사람들의 이름까지 확인된다. 비블로스 사절이 이집트까지 다녀온 기록도 있다. 이니의 전기 명문과 같은 시기의 자료이므로, 두 문서를 나란히 놓으면 비블로스를 지리적 중심에 둔 국제 교역망의 윤곽이 개인의 이름 수준까지 드러난다. 그 윤곽을 그린 문서는 모두 비블로스 밖에서 나왔다.
구왕국의 교역은 국가사업이었고, 기원전 2200년경 이집트 원정이 끊긴다. 소와다는 그 원인이 이집트 내부 사정과 레바논 해안의 사정 양쪽에 걸쳐 있을 수 있다고만 적는다. 차라프는 이집트 제1중간기(기원전 2181~2050년) 동안 교역이 멈춘 정황을 다른 문서에서 확인한다. 중왕국기에 필사된 파피루스 한 장의 뒷면에 적힌 「이푸웨르의 훈계」(레이던 파피루스 344 recto)가 비블로스로 가는 항해가 끊긴 일과 미라 제작에 쓰는 삼나무 수지와 목재가 부족해진 일을 한탄한다.
기원전 20세기에서 19세기 사이 교역이 되살아난다. 차라프는 세누스레트 1세의 카르투슈, 곧 파라오의 이름을 둘러싸는 타원형 테두리가 새겨진 석회석 조각, 남문 발굴에서 나온 제12왕조 이집트 토기, 그리고 멤피스에서 나온 미트라히나 명문을 그 지표로 든다. 미트라히나 명문에는 아메넴하트 2세 치세 두 해의 활동이 적혀 있고, 흔티시라 불리는 지역에서 배 두 척이 삼나무 통나무 231개를 실어 온 기록이 들어 있다. 이 231개가 선체에 실은 각재였는지 배 뒤에 매달아 끌고 온 통나무였는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왕조를 어떻게 부를지의 문제가 여기서 생긴다. 이 시기 비블로스 통치자들은 자기 셈어 이름 앞에 이집트 칭호 하티아(ḥꜣty-ꜥ)를 붙였다. 차라프는 이 칭호가 파라오만 수여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적고, 이집트에서 만든 스카라베 가운데 적어도 여섯 점에 '비블로스의 하티아'라는 명문이 있다고 밝힌다. 스카라베는 쇠똥구리 모양으로 깎은 이집트식 도장이며, 밑면에 이름이나 칭호를 새겼다. 우리말로 옮기면 '비블로스의 지사' 또는 '비블로스의 고관'에 가깝다. 왕이 아니다.
같은 인물이 다른 문서에서는 왕으로 불린다. 시리아 마리 왕국의 문서고에서 나온 점토판은 비블로스의 통치자 얀틴함무를 수메르어 왕 표기 lugal로 적었다. 마리의 짐리림(재위 기원전 1775~1760년)과 같은 시대다. 이집트 쪽 문서에서는 총독이고 메소포타미아 쪽 문서에서는 왕인 사람을 한국어로 무엇이라 부를지가 곧 이 도시의 지위를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의 문제가 된다.
차라프는 이 문제에서 신중하다. 이집트 기물이 많다는 사실이 이집트의 지배를 증명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의 표준 견해이며, 비블로스를 이집트 식민지나 보호령으로 보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첫 발굴자 몽테가 이 도시를 '작은 이집트'로 분류했고 윌리엄 올브라이트가 전례 없이 이집트화된 도시라고 평가했으나, 신전 배치를 보면 사정이 다르다. 발라트 게발 신전은 북시리아 계통의 축선형 평면을 유지했고, 오벨리스크 신전은 3천년기의 L자형 신전 자리에 들어서면서 광실형과 굴절축형을 결합한 새 평면을 취했다. 둘 다 이집트 종교 건축에는 없던 형식이다. 록사나 플라미니의 해석은 반대 방향이다. 비블로스 지배층이 언어와 행정 칭호와 종교 요소에서 이집트의 후원을 필요로 한 것은 레반트의 다른 왕·제후들과 경쟁하는 처지 때문이었다고 본다.
중기 청동기 왕 목록의 시간 눈금은 무덤 두 곳에 걸려 있다. 1922년에 확인된 왕실 묘역 1호분은 아비셰무 왕의 것으로, 아메넴하트 3세의 즉위명이 새겨진 흑요석·금 병이 들어 있었다. 즉위명은 파라오가 왕위에 오를 때 받는 공식 이름으로, 왕마다 다르므로 연대의 표지가 된다. 2호분은 그 아들 아비셰무아비의 것으로, 아메넴하트 4세의 이름이 새겨진 석제 병과 흑요석 상자가 나왔다. 이집트 왕의 재위 연대가 알려져 있으므로 이 기물이 무덤의 연대를, 무덤이 왕의 연대를 정해 준다. 이런 방식으로 두 왕이 기원전 19세기 말에 놓인다.
이 연결이 근래 흔들렸다. 차라프가 정리한 경위는 아래와 같다. 패티 거스텐블리스가 1983년에 1~3호분의 중기 청동기 I 연대에 의문을 제기했다. 무덤 안에 더 늦은 시기의 물건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1호분에서 나온 붉은 슬립을 입힌 국자형 작은 병은 중기 청동기 말 시돈 신전과 후기 청동기 초 텔 아르카 무덤에서 알려진 형식이다. 이어 카린 코페츠키가 2016년과 2018년 연구에서 두 무덤의 이집트 기물을 재검토하고, 두 매장을 제2중간기와 이집트 힉소스 지배기로 내려 잡았다. 제12왕조 파라오들의 기물은 중왕국이 무너진 뒤 이집트인들이 비블로스로 들여와 값나가는 물건으로 판 전리품이라는 해석이다. 이집트 텔 엘답아(고대 아바리스)의 힉소스기 이전 건물에서 '레테누의 통치자 이피셰무'라는 이름이 찍힌 인장이 나온 것이 그 근거의 하나다. 자수정 스카라베 세 점의 밑면 명문이 지워져 있었던 것도 함께 제시되었다. 잔루카 미니아치는 2020년에 같은 방향의 해석을 내놓았다.
왕실 묘역 1·2호분의 이집트 기물을 선물로 보는 경우와 약탈품 거래로 보는 경우에 아비셰무와 아비셰무아비가 놓이는 위치. 유물의 제작 연대는 그대로인데 매장 연대가 200년가량 뒤로 옮겨진다.
차라프는 이 제안에 반론도 있다고 밝힌다. 왕실 묘역 대부분이 도굴을 겪었기 때문이다. 정리되지 않은 문제라는 뜻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목록의 구조다. 중기 청동기 비블로스 왕들의 연대는 그 기물이 어떤 경로로 비블로스에 들어왔느냐에 달려 있다. 선물로 들어왔다면 왕들은 기원전 19세기 사람이고, 약탈품 거래로 들어왔다면 두 세기 이상 뒤로 내려온다.
같은 시기 이집트 문헌에는 이 도시를 가리키는 다른 종류의 언급도 있다. 차라프가 드는 저주 문서(Execration Texts)는 도자기 조각과 흙 인형에 적대 세력의 이름을 적어 저주한 문서인데, 크브니(Kbni)라는 지명이 아르카와 울라자와 함께 나온다. 파라오가 적대할 가능성을 미리 눌러두려 한 것인지 실제로 그 힘을 두려워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메넴하트 1세 치세에 쓰인 「시누헤 이야기」는 시누헤가 파라오 암살 음모를 듣고 달아난 곳으로 비블로스를 든다.
비블로스 왕 리브하다(Rib-Hadda, 다른 표기로 리브아디)는 기원전 14세기 중반의 인물로, 아마르나 서신 가운데 예순 통 가까이를 썼다. 한 도시의 군주가 남긴 분량으로는 문서고 안에서 가장 많다. 그의 이름은 아카드어 형태이고 북서셈어 폭풍신 하다드를 부르는 이름일 수 있으나, 편지에서 그가 부르는 신은 '비블로스의 여주인' 바알라트 구블라뿐이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불만과 요청이다. 아무루의 통치자 아부디아시르타가 자기 사람들을 빼내 반란을 부추긴다는 고발, 그가 보낸 자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보고, 병력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 이어진다. 아부디아시르타가 죽은 뒤에는 그 아들 아지루가 같은 정책을 이었고 리브하다의 요청도 계속되었다. EA 137에서 그는 자신이 다른 도시로 나가 있는 동안 자기 아우가 도시를 아부디아시르타의 아들들에게 넘기려 했고, 사절이 빈손으로 돌아온 것을 본 뒤 자신을 도시에서 몰아냈다고 적었다.
리브하다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일리라피다. EA 139와 140 두 통을 아케나텐에게 보냈고, 한 관리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이 인물이 리브하다의 아우인지 아들인지가 정해지지 않았다. 아우이자 반란의 주역으로 보는 해석이 오래 통용되었으나, 모하메드에마드 아보엘레아즈는 『안티구오 오리엔테』에 실은 논문에서 편지들의 순서를 다시 잡아 일리라피를 리브하다의 아들로, 곧 반란자가 아닌 계승자로 보았다.
왕 목록에서 이 구간은 부자 또는 형제 계승이 확인되는 드문 자리로 소개된다. 그런데 그 계승 관계가 무엇인지는 편지들을 어떤 순서로 놓느냐에 달려 있고, 편지의 순서는 대부분 내용으로 추정한다. 게다가 이 편지들은 파라오를 움직이려고 쓴 문장이다. 적의 위협은 크게, 자기 충성은 분명하게 적는 것이 이 문서의 목적이다. 비블로스 내부 정치에 대해 남은 거의 유일한 기록이 한 사람이 자기 목적으로 쓴 탄원서라는 사정을 놓고 계승 관계를 판정해야 한다.
기원전 11세기 비블로스 왕 자카르바알은 왕 목록에 들어 있다. 근거는 한 편의 이집트 문헌이다. 1890년 이집트 알히바에서 나와 1891년 카이로에서 러시아 이집트학자 블라디미르 골레니셰프가 구입한 파피루스로, 현재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에 있고 푸시킨 파피루스 120으로 등록되어 있다. 「웬아문 이야기」다. 후기 이집트어로 쓰였고, 같은 항아리에 「아메노페의 어휘집」과 「비탄 이야기」가 함께 들어 있었다.
줄거리는 아문 신의 배를 새로 만들 삼나무를 구하러 비블로스로 간 이집트 사절이 겪는 실패의 연속이다. 도중에 물건을 도둑맞고, 비블로스 왕 자카르바알에게 홀대받으며, 공식 서신을 갖추지 못한 탓에 곤경에 처한다. 이집트의 권위가 더는 통하지 않는 상태를 보여주는 자료로 널리 인용된다.
이 문헌의 성격은 정해지지 않았다. 문학적 장치와 행정 문서의 서술 방식이 섞여 있어 허구인지 실제 보고서인지에 대한 논의가 오래 이어졌다. 오늘날 다수 견해는 문학 작품 쪽이다. 대화와 상징을 쓰는 방식, 순수한 후기 이집트어 구어체 문체가 근거로 제시된다. 연대도 하나가 아니다. 이야기의 배경 연대, 파피루스가 필사된 연대, 작품을 지은 연대를 따로 따져야 하고 세 가지 모두 논쟁 중이다. 아르노 에그버츠는 1991년 『이집트 고고학지』 논문에서 이야기의 배경을 람세스 11세 재위 5년으로 보았다. 레반트의 정황이 기원전 1075년경보다 925년경에 가깝다는 견해도 나와 있다.
비블로스 왕 명단의 기원전 1100년대 항목 하나는 문학 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문헌 한 편에서 나왔고, 그 문헌의 배경 연대조차 150년 폭으로 논쟁된다.
'알파벳의 발상지'라는 설명을 따지려면 이 도시가 남긴 가장 이른 글부터 봐야 한다. 그 글은 알파벳이 아니고, 지금까지 읽히지 않았다.
1929년 뒤낭이 비블로스에서 처음 확인한 문자는 이집트 상형문자를 닮았으나 이집트 문자가 아니었다. 청동판과 청동 주걱, 석판과 석비에 새겨져 있었다. 뒤낭은 1945년 『비블리아 그람마타』(Byblia Grammata)에서 이 명문들을 공개하고 문자에 '비블로스 음절문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사 상형문자'(pseudo-hieroglyphic), '원비블로스 문자'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규모를 보면 이 문자가 음절문자로 분류된 까닭이 드러난다. 피사 고등사범학교가 운영하는 고대문자 자료집 므나몬의 정리에 따르면, 뒤낭이 1945년에 집계한 글자 수는 114자다. 가장 길고 온전한 두 청동판이 74자를 쓰고, 나머지 짧고 부서진 명문이 30자를 더한다. 자료는 1945년에 공개한 열 편에 1978년 뒤낭이 추가로 낸 석판 네 편을 더해 열네 편에서 열여섯 편으로 헤아린다. 므나몬은 이 정도 글자 수라면 알파벳일 수 없고 순수한 표어문자일 가능성도 낮다고 적으며, 음절문자로 본다. 쓰기 방향은 대개 오른쪽에서 왼쪽인데, 양면에 새긴 주걱 몇 점은 면마다 방향이 다르다.
연대도 확정되지 않았다. 통상 기원전 2천년기 전반, 좁게는 기원전 18세기에서 15세기 사이로 잡는다. 벤야민 사스는 2019년 논문에서 뒤낭이 이 명문들에 부여한 연대의 근거를 재검토해 일관되지 않는 부분을 지적하고, 유사 상형문자 명문과 초기 페니키아 알파벳 명문이 비블로스에서 한동안 함께 쓰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명문이 새겨진 물건 가운데 여러 점은 나중에 재사용되면서 원래 글이 지워지고 페니키아 알파벳 명문이 그 위에 새겨졌고, 그 페니키아 명문 몇 개는 기원전 10세기로 잡힌다.
이 도시가 알파벳과 관련해 차지하는 자리는 그래서 조심해서 서술해야 한다. 자음만 적는 알파벳의 원형은 시나이와 가나안 지역에서 형성된 원가나안 문자이며, 비블로스는 그 문자가 왕실 기념물에 쓰이고 교역로를 타고 퍼져 나간 중심의 하나였다. 발상지라는 말은 이 도시가 문자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런데 비블로스에서 나온 가장 이른 글쓰기 체계는 알파벳과 계통이 다르고 해독되지 않았다.
1923년 말 비블로스 주변 절벽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왕실 무덤 여러 기가 드러났다. 몽테가 발굴한 5호분은 수직 갱의 깊이가 10미터였고, 그 안에서 석회석 석관이 나왔다. 부조가 새겨져 있고 붉은 안료 흔적이 남아 있다. 긴 면에는 왕이 날개 달린 스핑크스를 새긴 왕좌에 앉아 행렬의 공물을 받는 장면이, 짧은 면에는 곡하는 여인들이 새겨져 있다. 글렌 마코는 이 부조를 페니키아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 미술 자료로 평가했다.
테두리와 뚜껑에 38개 낱말의 명문이 있다. 비블로스 지역의 고대 페니키아어로 쓰였고, 지금까지 발견된 완성된 페니키아 알파벳 명문 가운데 길이가 있는 것으로는 가장 이르다. 표준 명문집 『가나안어·아람어 명문』(KAI)의 1번 항목이다. 앞부분과 저주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ʾrn z pʿl [pl]s(?)bʿl bn ʾḥrm mlk gbl lʾḥrm ʾbh k šth bʿlm
이 관은 비블로스 왕 아히롬의 아들 [필]시바알이 자기 아버지 아히롬을 영원에 눕히며 만든 것이다.
아히람 석관 명문, KAI 1(도너·뢸리히 『가나안어·아람어 명문』 5판 1번), 머리쪽 면. 페니키아 문자 자음 표기를 라틴 문자로 음역했다.
wʾl mlk bmlkm wskn bs<k>nm wtmʾ mḥnt ʿly gbl wygl ʾrn zn tḥtsp ḥṭr mšpṭh thtpk ksʾ mlkh wnḥt tbrḥ ʿl gbl
왕들 가운데 어떤 왕이, 총독들 가운데 어떤 총독이, 또는 군대의 지휘관이 비블로스를 치고 올라와 이 관을 열면, 그 재판권의 홀이 부러지고 그 왕국의 왕좌가 뒤집히며 비블로스에서 평안이 달아날 것이다.
같은 명문, 뚜껑 측면.
글자 모양은 아래와 같다. 자음 하나에 글자 하나가 대응하고, 그 순서와 이름이 그리스 문자로 이어졌다.
페니키아 문자 다섯 자와 각각에 대응하는 그리스 문자. 알프·베트·감르·델트·람드라는 글자 이름이 알파·베타·감마·델타·람다로 남았다.
이 석관의 연대가 문제다. 명문의 문투가 문학적이고 고졸한 글자를 새긴 솜씨가 익숙하다는 점에서, 찰스 토리는 1925년 『미국동양학회지』 논문에서 이미 통용되던 서체로 판단했고 기원전 10세기 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에드워드 쿡은 1994년 『근동학지』 논문에서 대다수 연구자가 기원전 1000년경으로 잡는다고 적으면서 조반니 가르비니의 기원전 13세기 설을 검토해 물리쳤다. 그러나 다른 방향의 견해가 계속 제출되었다.
다섯 견해를 연대축에 얹으면 폭이 드러난다.
아히람 석관 연대에 관한 견해. 막대 하나가 한 연구자 또는 한 근거가 제시한 범위이며, 진한 색이 통설로 통용되는 기원전 10세기다. 다섯 견해를 합치면 기원전 1300년에서 700년까지 600년에 걸친다.
명문 자체에도 정해지지 않은 것이 있다. 아히람은 명문에서 왕으로 불리지 않는다. 왕이라 불린 사람은 그 아들이며, 이 때문에 아들 이토바알이 비블로스 왕으로 처음 명시된 인물이라는 서술이 오래 통용되었다. 그런데 그 이름은 결손부를 복원해 읽은 판독이다. 라인하르트 레만은 2015년 논문에서 결손부를 다시 복원해 아들의 이름을 [필]시바알로 읽자고 제안했고, 이토바알이라는 판독은 버려야 한다고 보았다. 아히람은 다른 어떤 고대 근동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같은 무덤 갱도 중간 남쪽 벽에 세 줄짜리 낙서가 새겨져 있다(KAI 2). 오래 통용된 해석은 더 내려가지 말라는 경고다. 레만의 2005년 연구는 이를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입문 의례의 일부로 읽었다. 같은 세 줄이 경고문이 되기도 하고 의례문이 되기도 한다.
연대 논쟁의 폭이 왕 목록에 그대로 옮겨진다. 아히람 석관은 비블로스 왕실 명문 다섯 편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취급되고, 그다음 왕들의 순서는 이 명문을 기준점으로 삼아 배열된다. 기준점이 기원전 13세기와 8세기 사이를 움직이면 그 뒤 배열도 함께 움직인다.
기원전 10세기 전후의 비블로스 왕들은 기록을 남기는 방식이 특이하다. 자기 기념물을 새로 세우는 대신 이집트 파라오의 상에 자기 이름을 새겼다.
아비바알의 명문은 셰숑크 1세의 상에 새겨져 있다. 엘리바알의 명문은 오소르콘 1세의 규암 흉상에 새겨져 있는데, 1881년경 발굴되어 발라트 게발 신전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 루브르에 있다(소장번호 AO 9502, 높이 60센티미터). 이 흉상에는 서로 관계없는 두 종류의 글이 함께 있다. 이집트 상형문자로는 오소르콘의 즉위명이 적혀 있고, 페니키아 문자로는 비블로스 왕 엘리바알의 봉헌문이 적혀 있다. 발굴 경위는 프랑스 고고학자 르네 뒤소가 1925년에 발표했다.
연대는 이집트 왕들의 재위로 걸린다. 근래 연구에서 셰숑크 1세의 재위는 기원전 943년에서 922/921년, 오소르콘 1세는 922/921년에서 888/887년으로 잡힌다. 엘리바알이 갓 즉위한 파라오에게서 흉상을 받아 그 위에 봉헌문을 새겼다고 보는 해석이 있다. 시피트바알 1세의 명문은 고문자학 분석에서 기원전 10세기 말이나 9세기 초로 잡힌다.
파라오가 비블로스 왕에게 자기 상을 선물했고 비블로스 왕이 그 위에 자기 이름을 새겼다는 사실을 두고, 비블로스가 독립 왕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라고 보는 해석이 있다. 종속을 보여주는 정황으로 읽을 수도 있다. 같은 유물이 두 방향으로 읽히는 것은 유물의 성격 때문이다. 선물과 조공은 물건만 보고 구분되지 않는다. 확인되는 것은 하나다. 이 왕들은 자기 권위를 표현할 때 이집트 왕의 형상을 매체로 썼다.
기원전 9세기 이후 비블로스 왕들의 이름은 아시리아 왕실 기록에서 나온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해안 도시 왕들에게서 조공을 받을 때 비블로스 왕도 그 안에 있었다. 이어지는 이름들은 모두 같은 성격의 문서에서 나온다.
| 이름 | 근거가 되는 기록 |
|---|---|
| 사파트바알 2세 | 아카드어로 시비티비일.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재위 8년(기원전 738년) 조공자 명단. |
| 우루밀키 | 아카드어로 우루밀키. 센나케립의 레반트 원정 때 조공을 바친 아무루 지역 왕 명단. |
| 밀키아샤파 | 기원전 670년경 에사르하돈이 조공을 명한 레반트·키프로스 왕 명단, 그리고 아슈르바니팔의 첫 원정 기록. |
이 구간에서 왕의 이름은 두 가지 형태로 전한다. 사파트바알은 페니키아어 형태이고 시비티비일은 같은 이름의 아카드어 표기다. 한 사람의 이름이 정복자의 언어로 옮겨진 뒤 그 표기로만 남았다. 이 시기 비블로스에서 나온 현지 왕실 기념물은 없다. 도시가 독자적으로 기념물을 세울 처지가 아니었다는 사정 자체가 정보다. 페니키아의 주도권은 남쪽의 시돈과 티레로 넘어가 있었다.
기원전 5세기에 사정이 달라진다. 비블로스 왕이 자기 언어로 자기 계보를 적은 기념물이 나온다.
예하우밀크 스텔레는 르낭의 페니키아 조사가 끝나갈 무렵 비블로스에서 발견되었다. 1869년의 일이고, 조개껍질이 섞인 석회석에 14행의 페니키아어 명문이 새겨져 있다. 높이 1.14미터, 너비 0.55미터, 두께 0.26미터다. 프랑스 고미술 수집가 루이 드클레르크가 입수했고 상속인들이 루브르에 기증했다. 오른쪽 아래 결손 조각은 70년 뒤인 1930년대에 뒤낭이 성채 남서쪽 모퉁이 앞에서 찾아냈다. 그 자리는 뒤에 바알라트 구블라 성소로 확인된 지점의 바로 옆이다. 조각은 베이루트 국립박물관 수장고에 있고 공개 전시된 적이 없다. 명문집 번호는 KAI 10 또는 CIS I 1이다.
ʾnk yḥwmlk mlk gbl bn yḥrbʿl bn bn ʾrmlk mlk gbl ʾš pʿltn hrbt bʿlt gbl mmlkt ʿl gbl
나는 비블로스 왕 예하우밀크, 예하르바알의 아들이며 비블로스 왕 우리밀크의 손자다. 여주인 바알라트 게발이 나를 비블로스의 왕으로 세웠다.
예하우밀크 스텔레 1~2행, KAI 10 = CIS I 1. 페니키아 문자 자음 표기를 라틴 문자로 음역했다.
이 여섯 줄 안에 3대가 들어 있다. 우리밀크에서 예하르바알로, 예하르바알에서 예하우밀크로 이어지는 계보가 왕 자신의 명문으로 확인되는 것은 이 도시 역사에서 드문 일이다. 왕권의 정당성을 끌어오는 대상도 달라졌다. 이 명문에서 왕을 세운 주체는 도시의 수호 여신이다. 연대는 고문자학, 위쪽 부조의 페르시아식 도상, 나중에 확인된 층서를 근거로 페르시아기, 곧 기원전 5세기나 4세기로 잡는다. 기원전 450년경으로 적는 자료가 많다.
이 시기 뒤쪽 왕들은 주화로 확인된다. 기원전 425년경 엘파알, 400년경 오즈바알, 375년경 우리밀크 3세, 그리고 기원전 332년의 아이넬이다. 오즈바알의 경우 어머니 바트노암과 사제였던 아버지 팔티바알의 이름까지 전한다. 아이넬은 그리스어로 에닐로스라 적히며, 알렉산드로스의 티레 공성 때 그에게 협력했다고 복원된 왕 목록에 적혀 있다.
왕 목록의 재료가 이 구간에서 바뀐 것을 눈여겨볼 만하다. 청동기에는 이집트 기물과 점토판, 철기 초에는 석관과 파라오 상의 명문, 아시리아기에는 조공 장부, 페르시아기에는 봉헌 스텔레와 주화다. 이 도시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의 종류가 시기마다 다른 이유는 남은 기록의 종류가 달라졌다는 사정에 있다.
비블로스 왕의 이름이 확인되는 구간과 그 근거 자료. 위 줄은 이집트·마리·아시리아·그리스가 남긴 기록이고 아래 줄은 비블로스에서 나온 기록이다. 아래 줄의 기원전 10세기 구간은 석관 명문과 파라오 상에 새긴 명문이며, 나머지 두 구간이 봉헌 스텔레와 주화다.
복원된 왕 목록의 마지막 항목은 기원전 68년의 키니루스다. 근거는 스트라본의 『지리지』 16권 2장 18절이다. 스트라본은 기원전 64/63년에 태어나 서기 24년경까지 산 그리스 지리학자다.
해당 대목의 내용은 이렇다. 레바논 산지를 차지한 세력이 산 위와 해안의 요새를 거점으로 삼아 비블로스와 베리투스(오늘날의 베이루트)를 노략했고, 폼페이우스가 그 거점들을 파괴했다. 비블로스는 키니라스의 왕도이며 아도니스에게 바쳐진 도시인데, 폼페이우스가 그 참주의 목을 도끼로 베어 도시를 폭정에서 풀어주었다. 도시는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높은 자리에 있다.
한 문단 안에 왕정의 소멸이 들어 있다. 문제는 이름이다. 키니라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숭배와 아도니스 설화에 얽힌 인물이며, 스트라본에 따르면 그 전에 페니키아 비블로스를 다스렸다. 왕 목록에 실린 기원전 68년의 키니루스가 실재한 인물의 이름인지, 아도니스 숭배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의 통치자에게 붙은 신화적 호칭인지 판정하기 어렵다. 이 도시 왕조의 마지막 이름이 신화 인물과 겹친다는 사정은 이 목록 전체의 성격을 요약한다. 이름은 남았으나 그 이름을 적은 손은 언제나 밖에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 이후 이 도시는 제국의 행정 단위가 된다. 로마기 유적으로는 기원후 218년경에 세운 극장, 열주로, 님파이움이 남아 있다. 극장은 원래 성문과 대신전 사이에 있던 것을 나중에 바다 쪽으로 옮겼고 현재는 다섯 단만 남았다. 아도니스 숭배는 로마기까지 이어졌다. 인접한 아프카 일대가 아도니스 설화의 무대로 전하며, 아도니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는 아도니아 축제가 비블로스와 알렉산드리아, 아테네 등에서 열렸다.
7세기 아랍 정복 이후 이 도시는 지방 항구가 된다. 중세의 경위는 십자군 기록으로 전한다. 1104년 4월 툴루즈 백작 레몽 드 생질이 파티마 조 시기 이곳의 영주였던 바누 암마르의 저항을 꺾고 지벨레를 점령한 뒤, 전투를 도운 제노바 엠브리아코 가문에 도시의 3분의 1을 주었다. 1109년 6월 26일 레몽의 아들 베르트랑이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와 여러 영주가 참석한 자리에서 굴리엘모 엠브리아코를 통해 제노바의 산 로렌초 교회에 지벨레 전체를 주었고, 이후 엠브리아코 가문은 제노바 대성당에 봉납금을 내는 조건으로 이 도시를 부자 상속의 세습 봉토로 보유했다.
성채는 12세기에 십자군이 현지 석회암과 로마 건물의 석재를 재활용해 세웠고 주위에 호를 둘렀다. 1157년 지진으로 크게 손상되었다.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지벨레 영주 위그 3세가 포로가 되자 살라딘은 수비대의 항복을 조건으로 그를 풀어주었고, 1188년에 도시와 성을 점령했다. 1190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벽과 성채 일부를 허물게 했다. 1197년에는 지벨레 영주 부인의 교섭으로 무슬림 총독이 도시를 평화롭게 돌려주어 십자군이 다시 차지했다. 1289년에 성채와 도시가 맘루크에게 넘어갔고, 마지막 영주 피에트로 엠브리아코는 술탄에게 공납을 바치며 주변 영지를 유지했으나 1300년에 잃고 키프로스로 떠났다. 맘루크의 최종 접수 시점은 자료마다 1266~67년, 1289년, 1302년으로 다르게 적혀 있다. 군사적 점령 시점과 봉건 영지의 소멸 시점을 각기 다르게 잡기 때문이다.
1516년부터 1918년까지 이 도시와 지역 전체는 오스만 제국에 속했다. 교역 중심은 트리폴리와 베이루트로 옮겨갔고 비블로스는 작은 어항으로 남았다. 이 400년을 다룬 서술이 앞의 어느 시기보다 짧은 것은 남은 기록이 적기 때문이다. 도시가 이집트나 아시리아나 제노바의 관심에서 벗어난 시기는 이 도시의 역사에서 곧 공백에 가까운 시기가 된다.
이 도시를 소개하는 글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끊기지 않고 사람이 살아온 도시라는 표현이 거의 빠지지 않는다. 이 표현이 무엇을 재는 말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본 숫자는 두 개다. 최초 거주는 기원전 8800년에서 7000년 사이, 연속 거주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다. 두 숫자의 성격이 다르다. 앞의 숫자는 사람이 머문 가장 이른 흔적의 연대이고, 뒤의 숫자는 그 이후 거주가 끊긴 흔적을 찾지 못한 시점이다. '끊기지 않았다'는 판정은 반대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판정에 가깝다. 뒤낭의 발굴 방식이 층의 경계를 지웠다는 앞의 사정이 여기에 그대로 걸린다.
도시화 시점은 또 다른 숫자다. 도시로 발전한 시기는 기원전 3천년기로 잡는데, 초기 청동기 비블로스가 도시 모델에 온전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더 브레이제의 지적을 함께 놓으면, 무엇을 도시로 부를지에 따라 3천 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성벽과 성문과 공공 건물을 갖춘 단계를 기준으로 잡으면 기원전 3100~2800년의 초기 청동기 II이고, 사람이 모여 산 정착지를 기준으로 잡으면 기원전 5000년이며, 최초의 흔적을 기준으로 잡으면 기원전 8800년이다.
유네스코의 공식 문구는 이 표현을 쓰지 않는다. 1984년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 8차 회기에서 비블로스가 등재되었고, 등재 근거는 문화유산 기준 (iii)·(iv)·(vi)이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권고문은 세 기준을 이렇게 적었다. (iii) 비블로스는 페니키아 문명의 시작을 보여주는 예외적 증거다. (iv) 청동기 이래 비블로스는 지중해 세계 도시 조직의 으뜸가는 사례 가운데 하나를 제공한다. (vi) 비블로스는 아히람·예히밀크·엘리바알·사파트바알 명문과 함께 페니키아 알파벳 확산의 역사와 직접적이고 유형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위원회는 고대 취락과 성벽 안 중세 도시, 묘역 일대를 포괄하는 넓은 보호구역을 함께 지정하도록 요청했다. 등재문에는 '신석기 이래 거주해 왔다'고 적혀 있고 '가장 오래되었다'고는 적혀 있지 않다.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표현은 그래서 검증 가능한 사실이 아니라 경합하는 주장이다. 무엇을 도시라 부르고 연속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예리코, 다마스쿠스, 알레포가 같은 자리를 주장한다. 이 주장이 비블로스에 자주 붙은 까닭은 이집트 문헌에 2천 년 가까이 이름이 오른 덕에 다른 가나안 도시보다 비교할 문서가 많이 남았다는 사정에 있다.
이 도시의 7천 년을 복원한 재료를 한자리에 모으면 목록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집트 왕실 연대기와 원정 기록, 이집트 관리들의 전기 명문, 저주 문서와 문학 작품, 마리와 에블라의 점토판, 아마르나 문서고의 탄원서, 아시리아 왕들의 조공 장부, 그리스 지리학자의 한 문단, 십자군 연대기와 제노바의 봉토 문서다. 이 가운데 비블로스 사람이 쓴 것은 왕실 명문 다섯 편과 예하우밀크 스텔레, 그리고 주화에 새긴 이름들뿐이다. 비블로스 사람이 가장 먼저 쓴 글, 곧 유사 상형문자 명문 열네 편에서 열여섯 편은 아직 읽히지 않는다.
두 통념은 앞서 정리한 사료 구성에서 나온다. '가장 오래된 도시'는 무엇을 도시라 하고 연속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세 개의 서로 다른 숫자가 되는 주장이며, 유네스코 등재문도 그 표현을 쓰지 않는다. '알파벳의 발상지'는 이 도시가 문자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읽히지만, 여기서 나온 가장 이른 글쓰기 체계는 알파벳과 계통이 다르고 해독되지 않았으며, 알파벳 명문 가운데 가장 이른 아히람 석관의 연대는 기원전 13세기부터 8세기까지 논쟁된다. 왕조도 같은 사정이다. 중기 청동기 왕들의 연대는 이집트 기물이 선물로 들어왔는지 약탈품 거래로 들어왔는지에 달려 있고, 후기 청동기 계승 관계는 편지들을 어떤 순서로 놓느냐에 달려 있으며, 철기 초 왕 하나는 문학 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문헌에서 나왔고, 아시리아기 왕들은 정복자의 언어로 표기된 이름으로만 남았다. 자기 계보를 자기 명문으로 3대까지 적은 구간은 페르시아기 한 번이다.
남은 물음은 이 사료 구성을 어디까지 메울 수 있느냐다. 유네스코가 등재 기준 (vi)의 근거로 지목한 네 명문의 연대가 학계에서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정은 남아 있다. 판정을 바꿀 수 있는 작업은 세 갈래다. 비블로스 유사 상형문자의 해독, 뒤낭이 20센티미터 단위로 걷어낸 층서의 재구성, 그리고 도시 남쪽 항구 구역의 발굴이다. 뒤낭의 발굴 문서고가 제네바에서 비블로스로 돌아온 경위는 2024년에 나온 논문집에서 한 장을 차지할 만큼의 일이었고, 그 문서고의 검토는 시작 단계다. 프랑스·레바논 합동 조사가 남문과 고대 항구 일대에서 확인한 이집트 토기와 현지 토기의 조합은 뒤낭이 파낸 구역 밖에서 나온 자료다. 확인하지 못한 것도 밝혀 둔다. 아히람 석관의 연대, 아히람 아들의 이름 판독, 중기 청동기 왕실 무덤의 연대, 기원전 68년 키니루스의 실재 여부는 이 글을 쓰는 시점에 합의되지 않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