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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기문자 해독과 1857년의 대조 번역 시험 — 봉인한 번역 넷을 열어 방법을 검증한 과정

베히스툰 비문의 사본이 유럽에 도착한 뒤에도 학계는 쐐기문자가 해독되었다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기호 하나가 여러 음가를 갖는 체계라면 아무 말이나 끼워 맞출 수 있다는 반박 때문이었다. 1857년 왕립아시아학회는 네 사람에게 같은 명문을 따로 번역하게 하는 시험으로 이 반박에 대응했다. 해독이 지식으로 승인된 것은 그 절차를 통과한 뒤였다.

2026년 9월 13일

쐐기문자는 기원후 1세기 무렵 사용이 끊겼고 읽는 법도 함께 잊혔다. 18세기 말 유럽인들이 페르세폴리스에서 베껴 온 명문은 못 자국 같은 기호의 나열일 뿐이었다. 이 기호들을 다시 읽게 되는 과정은 보통 한 사람의 이름으로 요약된다. 헨리 크레스위크 롤린슨이 베히스툰 절벽에 올라가 명문을 베꼈고 그것으로 쐐기문자를 풀었다는 서술이다.

이 서술은 실제 일정과도 어긋나고, 무엇보다 해독이 어떻게 인정받았는지를 빠뜨린다. 사본을 손에 넣는 것과 그 사본을 읽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고, 후자는 1857년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로제타석에 빗대는 설명이 감추는 것

베히스툰 비문을 로제타석에 견주는 비교는 슈미트를 포함한 전문 연구자들도 쓴다. 다만 두 유물은 조건이 다르다.

1799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로제타석에는 같은 내용이 이집트 상형문자, 민중문자, 그리스어로 적혀 있다. 셋 중 그리스어는 유럽 학자들이 이미 읽을 수 있는 언어였다. 즉 미지의 문자와 기지의 언어가 한 돌 위에 나란히 있었다.

베히스툰에는 그런 언어가 없다.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세 판본 모두 당시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로 적힌 읽을 수 없는 언어였다. 대조표는 있었지만 기준이 될 항목이 없었다. 해독은 그래서 추정으로 시작해야 했다.

고대 페르시아어 쐐기문자 아케메네스 왕들이 자기 모어를 적기 위해 쓴 표기 체계다.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에서 쐐기라는 획 형태만 빌려 왔을 뿐 구조가 다르다. 기호 하나가 자음 하나 또는 자음과 모음의 결합을 나타내고, 낱말 몇 개를 통째로 나타내는 기호가 따로 몇 개 있으며, 낱말 사이를 갈라 주는 구분 기호가 있다. 총 기호 수는 표의 기호와 구분 기호를 어떻게 세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수백 개인 바빌로니아어 쐐기문자와 비교하면 훨씬 적다. 이 적은 규모가 해독의 출발점이 되었다.

해독의 순서가 이렇게 정해진 데는 이유가 있다. 고대 페르시아어는 기호 수가 적었고, 언어 쪽으로도 짚을 것이 있었다. 유럽 학자들은 아베스타어와 산스크리트를 통해 이 계통의 언어가 어떤 모습인지 대략 알고 있었고, 그리스 사료 덕분에 다리우스, 크세르크세스, 히스타스페스 같은 왕 이름의 발음도 알고 있었다. 뜻을 아는 상태에서 기호만 맞추는 문제였다는 뜻이다. 엘람어와 바빌로니아어에는 이런 발판이 없었다.

그로테펜트는 이름 몇 개로 시작했다

첫 돌파는 페르세폴리스 명문에서 나왔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그로테펜트는 1802년 괴팅겐에서 페르세폴리스 명문의 해석에 관한 발표를 했고, 그 내용은 1815년 아르놀트 헤렌의 저작 『고대 주요 민족의 정치·교류·교역에 관한 고찰』 안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발표에서 출판까지 13년이 걸렸다.

그로테펜트가 쓴 방법은 반복되는 기호 묶음의 자리를 보는 것이었다. 명문에는 같은 구조가 되풀이되고 그 안에서 한 낱말만 바뀌는 자리가 있었다. 그는 이것을 왕의 이름과 칭호로 보고, 아케메네스 왕가의 계보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들어갈 자리에 그리스 사료로 알려진 이름을 대입했다.

이 작업의 결과는 제한적이었다. 그로테펜트는 왕 이름 몇 개와 기호 몇 개를 맞혔을 뿐이고, 체계 전체를 읽어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방법 자체는 이후 작업의 틀이 되었다. 롤린슨이 1835년에 하마단 근처 알반드 산의 다리우스 1세 및 크세르크세스 1세 명문을 베끼면서 시도한 것도 같은 방법이었다. 그는 자기 작업이 독립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면서도, 그로테펜트가 아케메네스 왕가의 이름 몇 개를 해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1839년 원고에 적었다. 피터 대니얼스는 롤린슨이 1836년 테헤란에서 그로테펜트의 1815년 독일어 출판물을 직접 참조했다고 스스로 밝힌 대목도 지적한다.

롤린슨이 실제로 한 일의 일정

롤린슨은 동인도회사 군 장교였고, 1830년대 중반 케르만샤에 주둔하며 지방 총독의 군사 고문으로 일했다. 베히스툰 작업은 이 복무의 여가에 이루어졌고, 군무 때문에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

대니얼스가 정리한 일정은 다음과 같다. 1835년 4월 알반드 산의 두 명문을 베꼈다. 그 직후 베히스툰을 처음 보았으나 군무 때문에 1년 넘게 손대지 못했다. 1836년 5월 말 바위 턱까지 반복해서 기어올라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의 첫 부분을 베꼈다. 1837년 초에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의 거의 절반을 옮겨 적었고 그해 9월 첫 주에 나머지를 마쳤다. 그다음 아프가니스탄 복무로 중단되었다가, 1843년 12월 바그다드로 돌아온 뒤 1844년 9월 4일부터 10일까지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을 다시 베끼고 엘람어 판본과 부조에 붙은 짧은 바빌로니아어 명문들의 종이 탁본을 떴다. 이때 그는 명문 아래에 자기 이름을 새겼다. 본문 전체를 이룬 바빌로니아어 판본을 베낀 것은 1847년 9월이다.

대니얼스는 여기서 널리 퍼진 서술 하나를 명시적으로 정정한다. 롤린슨이 절벽 위에서 밧줄에 매달려 내려왔다는 서술이 백과사전 항목에까지 실려 있는데, 1836년 작업에서는 어느 경우에도 그런 일이 없었고 그는 기어올라 갔다. 슈미트가 인용한 롤린슨 자신의 1852년 보고에도 밧줄이나 사다리 없이 하루에 서너 번씩 바위를 올랐다는 진술이 있다. 밧줄이 등장하는 것은 1844년 작업부터이며, 이때 그는 A. 헥터와 J. F. 존스의 도움을 받아 셋이 함께 밧줄로 바위 턱까지 올라갔다.

이른바 쿠르드 소년의 일화는 이 일정의 마지막 국면에 속한다. 바빌로니아어 판본은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보다 높은 곳, 돌출한 바위면에 있어 접근이 어려웠다. 1847년 가을, 멀리서 온 한 쿠르드 소년이 시도를 자청했다. 소년은 돌출부 왼쪽 바위틈으로 몸을 밀어 올라가 나무 쐐기를 박고 밧줄을 맨 다음, 반대편 틈으로 몸을 날려 건너갔고, 두 번째 쐐기를 박아 돌출부 위로 건너올 수 있게 했다. 그런 다음 짧은 사다리로 그네 모양의 걸상을 만들어 거기 앉은 채 롤린슨의 지시를 받아 바빌로니아어 판본의 종이 탁본을 떴다. 롤린슨은 이 과정을 1852년 『아르카이올로기아』 34권에 실은 보고에 적었다. 대니얼스는 초기의 기록에서는 소년이 두 명이었다고 덧붙인다. 롤린슨 자신은 그에 앞서 망원경으로 이 판본을 두 차례 읽어 두기도 했다.

이 일화는 자주 인용되지만, 인용될 때마다 대상이 바뀐다. 소년이 탁본을 뜬 것은 바빌로니아어 판본이지 고대 페르시아어 본문이 아니며, 시점은 1847년이지 1835년이 아니다. 그런데 여행 안내서는 1835년에 롤린슨이 몇 달 동안 절벽에 매달려 탁본을 떴고 그 탁본이 해독의 돌파구가 되었다고 적는다. 두 사실이 뒤섞이면 한 사람이 한 번에 모든 것을 해낸 이야기가 된다.

사본을 공개해 길을 열었다는 문장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

더 중요한 정정이 따로 있다. 롤린슨이 삼중언어 명문의 사본을 학계에 제공함으로써 엘람어와 바빌로니아어 문자 체계의 해독에 길을 열었다는 서술이 표준적으로 쓰인다. 슈미트가 쓴 백과사전 항목에도 그 문장이 있다. 대니얼스는 같은 백과사전의 다른 항목에서 이 문장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근거는 출판 연도다. 롤린슨이 뜬 탁본에서 팬터그래프로 옮긴 엘람어 판본 도판은 1855년에야 나왔고, 바빌로니아어 판본 도판은 1866년 이후, 실제로는 1870년에 나온 『서아시아 쐐기문자 명문』 제3권의 도판 39~40번으로 공개되었다. 그 사이에 엘람어와 바빌로니아어 해독 작업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사본이 공개되기 전에 벌어진 일을 사본 공개의 결과로 적을 수는 없다.

롤린슨 자신의 출판도 지연이 심했다. 대니얼스는 그 이유로 군무, 완벽주의, 미루는 습관을 든다. 바그다드와 런던 사이의 우편은 2주에 한 번 있었고 배달에 한 달 남짓 걸렸다. 원고는 조각조각 도착했다. 1845년 2월에 완역을 보냈고, 그해 8월에 크리스티안 라센의 1844년 저작을 받아 그것을 반영해 수정했으며, 9월에 도판과 전사와 주석과 라틴어 번역을, 10월에 1~2장을, 11월에 3장을, 1846년 2월에 4장을, 4월에 5장을, 8월에 보충 노트를, 그해 말에 6장의 앞 절반을 보냈다. 6장은 고대 페르시아어 자모의 절반을 다루다가 낱말 중간에서 끊긴 채 출판되었고, 계획되었던 7~8장은 나오지 않았다.

이 원고들을 정리해 인쇄에 부친 사람은 왕립아시아학회의 에드윈 노리스였다. 저자가 현장에 없는 상태에서 노리스는 쐐기문자 활자를 새로 깎는 일까지 감독했다. 다만 대니얼스는 노리스의 편집 판단 일부가 롤린슨의 작업 경과를 오히려 가렸다고 지적한다. 1845년 2월 판을 반영해야 할 번역문을 1846년 2월 판 쪽으로 고쳐 놓는 식이었다.

기호 하나가 여러 음가를 갖는다는 문제와 힝크스의 몫

해독의 결정적 대목은 표기 체계의 성격을 알아내는 데 있었다. 고대 페르시아어 쐐기문자가 음절 성분을 가진 체계라는 사실을 롤린슨과 에드워드 힝크스는 각자 독립적으로, 같은 시기에 알아냈다. 두 사람 모두 1846년 8월 노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점을 밝혔다.

힝크스는 아일랜드의 성직자로, 쐐기문자 연구를 대학이나 박물관 바깥에서 했다. 그는 아카드어가 히브리어를 비롯한 셈어와 친족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본 사람이며, 바빌로니아어 기호와 아시리아어 기호가 같은 체계의 변종이라는 사실도 먼저 밝혔다. 롤린슨은 1846년 10월 27일 G. C. 르누아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점을 힝크스에게 빚졌다고 인정했으나, 공개적으로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롤린슨이 바빌로니아어 쪽에서 어디까지 나아가 있었는지도 대니얼스가 구체적으로 적는다. 1850년의 강연 시점까지도 그는 엘람어 음절 목록이 바빌로니아어 음절 목록의 부분집합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바빌로니아어 기호 가운데 자모에 해당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 결과 동사 활용을 전혀 정리하지 못했다. 기호 하나가 서로 무관한 여러 음가를 가진다는 사실 자체는 알아보았으나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가 1850년에 내놓은 아시리아 왕 샬마네세르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 번역은 일부는 오늘날의 번역과 완전히 일치하고 일부는 근거 없는 창작이다. 그는 다마스쿠스를 다른 이름으로 옮겼고, 처음으로 발견된 성경 인물 언급인 '오므리의 아들 예후'를 놓쳤다. 그 대목을 알아본 사람은 힝크스였고, 1851년의 일이다.

롤린슨이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보인 능력은 현대 이란어들에 대한 그의 지식에서 나왔고, 히브리어와 아랍어에 밝지 않았던 그는 바빌로니아어에서 같은 수준을 보이지 못했다. 대니얼스의 평가는 이 대비를 기준으로 삼는다.

1857년 5월, 봉인된 번역 넷을 열었다

1857년 초 쐐기문자 해독에 대한 일반의 신뢰는 낮았다. 대니얼스는 그 이유의 하나로 롤린슨과 힝크스의 끊이지 않는 의견 충돌을 든다. 두 사람이 같은 본문을 두고 다른 결과를 내놓는 상황에서, 이 작업이 자의적 끼워 맞추기일 수 있다는 의심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기호 하나가 여러 음가로 읽히고 같은 음이 여러 기호로 적히는 체계라면, 해독자가 원하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반박이 성립할 수 있었다.

이 반박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은 절차였다. 윌리엄 헨리 폭스 탤벗이 그 절차를 제안했다. 사진술을 개발한 그 사람이며, 롤린슨의 후원을 받는 쪽에 속해 있었다. 그는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의 명문을 석판으로 찍은 출판 전 사본을 입수해 그것을 번역한 다음, 봉인한 꾸러미로 왕립아시아학회에 보냈다. 그러면서 롤린슨과 힝크스에게도 같은 본문의 번역을 제출하도록 청하자고 제안했다.

학회 간사 노리스가 1857년 4월 20일 힝크스에게 보낸 편지에 절차가 적혀 있다. 탤벗의 번역은 롤린슨이 자기 번역을 내놓을 때까지 봉인해 두고, 두 번역이 서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게 한다. 오페르트도 같은 시도를 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롤린슨은 힝크스도 번역을 준비하기를 원한다고 전했고, 그렇게 한다면 원본의 석판 사본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힝크스의 번역도 봉인해 두며, 네 번역은 5월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개봉한다.

조건은 균등하지 않았다. 힝크스는 본문을 늦게 받아 끝까지 번역하지 못했다. 당시 런던에 머물던 파리의 율리우스 오페르트는 자기가 가진 불완전한 사본으로 참가했다. 1857년 5월 29일, 당대 영국의 저명한 지식인들로 구성된 심사단이 네 번역의 일치 정도를 상세히 보고했다. 롤린슨과 힝크스의 번역이 서로 가장 가까웠다. 심사단은 해독이 성공했다고 판정했다. 노리스가 6월 10일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휴얼 박사에게 보낸 감사 편지가 심사 위원회의 구성을 확인해 준다.

네 사람의 번역은 1861년 왕립아시아학회 학회지 18권 150~219쪽에 '대조 번역'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실렸다. 제출 시점과 출판 시점 사이에 4년이 있었다.

엘레나 토레스 토레스는 2007년 논문에서 이 시험을 아카드어 해독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건으로 규정하고, 그 배경에 쐐기문자의 기초와 해독 방법에 대한 학계의 일반적 회의가 있었다고 정리했다. 시험 대상이 된 명문은 아수르 유적에서 막 발견된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의 원통 명문이었다. 새로 나온 본문을 골랐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미 여러 사람이 손댄 본문이었다면 일치는 사전 합의를 보여주는 데 그쳤을 것이다.

누가 무엇을 읽었는지에 대한 뒷날의 계산

이후의 서술은 균형을 잃었다. 롤린슨 생전에 나온 평가들은 오히려 공정했다. 오페르트는 1878년 서평에서 힝크스가 쐐기문자 기호 103개를 올바로 읽어냈고 롤린슨이 61개, 자신이 147개를 읽어냈다고 계산했다. 파울 하우프트가 1889년에, 요하네스 플레밍이 1894년에 쓴 평가, 그리고 1895년 3월 9일 『아테네움』에 실린 부고도 두 사람의 기여를 따져서 다루었다.

기울기가 생긴 것은 그 뒤다. 롤린슨의 동생 조지 롤린슨이 1898년에 쓴 형의 전기에는 힝크스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월리스 버지가 1925년에 쓴 아시리아학 역사서는 아일랜드인 힝크스를 곳곳에서 깎아내린다. 정확한 서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아치볼드 세이스가 1907년에, 로버트 로저스가 1911년과 1915년에 두 사람의 기여를 제대로 정리했다.

롤린슨 자신의 서술 방식도 이 기울기에 기여했다. 슈미트는 1991년 판본에서, 롤린슨이 1847년 논문에서 베히스툰 명문을 두고 규모와 제작의 아름다움과 균일성과 정확성에서 세계에 필적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쓴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과장이라고 적었다. 롤린슨의 마지막 주요 기여는 대영박물관 소장 본문의 석판 도판 다섯 권에 자기 이름을 올린 것이었는데, 대니얼스는 그 작업이 일반적으로 '조수들'의 것으로 이해된다고 적는다. 다만 흩어진 파편을 맞춰 한 점의 점토판으로 복원하는 작업은 롤린슨이 많이 했다.

결론 — 해독을 지식으로 만든 것은 재현 가능성이었다

쐐기문자 해독은 한 사람이 절벽에 올라가 사본을 떠 온 사건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요약이 어긋나는 지점은 세 군데다.

첫째, 출발점은 페르세폴리스였다. 그로테펜트가 1802년에 반복 구조와 왕 이름으로 시도한 방법이 틀을 만들었고, 롤린슨은 1835년부터 같은 방법을 알반드 명문에 적용했다. 베히스툰은 그 방법을 대규모로 검증할 자료였고, 방법 자체는 그보다 앞서 나와 있었다.

둘째, 사본의 공개와 해독의 진행은 시간표가 맞지 않는다. 엘람어 도판은 1855년, 바빌로니아어 도판은 1870년에 나왔고, 그 이전에 해독 작업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그 작업의 핵심 고비인 음절 구조의 발견은 롤린슨과 힝크스가 1846년 8월에 각자 도달했고, 바빌로니아어와 아시리아어 기호의 등가는 힝크스가 먼저 밝혔다. 롤린슨은 이를 사신에서만 인정했다.

셋째, 해독이 참으로 인정받은 것은 개인의 독해력 때문이 아니라 1857년의 절차 때문이었다. 새로 발견된 명문을 네 사람에게 따로 주고, 서로 접촉을 막고, 봉인한 채로 같은 날 열어 비교했다. 네 번역 사이의 일치가 확인되었고 심사단이 그것을 판정했다. 이 절차가 겨냥한 것은 이 작업이 원리적으로 자의적이라는 의심이었다. 같은 입력에서 여러 사람이 같은 출력을 내면 방법이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뜻이 된다.

남는 물음은 이 절차가 얼마나 일반화될 수 있었는가다. 1857년의 시험에서 네 사람의 조건은 균등하지 않았다. 힝크스는 본문을 늦게 받았고 오페르트는 불완전한 사본으로 참가했으며, 탤벗은 롤린슨과 가까운 쪽에 있었다. 심사단이 보고한 것도 완전한 일치가 아닌 일치의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 시험은 새로 발견된 본문을 대상으로 삼았고 사전 조율을 차단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었다. 이후 아시리아학이 다룬 수십만 점의 점토판은 이 판정 위에서 읽혔고, 그 판정을 다시 검증할 기회는 새 본문이 나올 때마다 반복되었다.